벽
박소란
슬퍼 모로 누웠을 때
가만가만 등을 쓸어주는 손길이 있었다
벽,
하나의 벽이 있었다
언제부터
벽은 거기에 있었나
벽에 기대어 생각했다 벽의 아름다운 탄생에 대해
벽은 온화하고 벽은 진중하니까 벽은 꼭 벽이니까
슬픔을 멈추고 잠시 축배를 들었다
그때
벽에서 새어나온 비밀스러운 속삭임
쉿, 아침이 오고 있어
빛이 스며드는 베란다를 훔쳐보다 얄브스름한 커튼을 매만지다
그래 내일은 커튼을 바꾸자
보다 두껍고 견고한 것으로
벽 쪽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 불길한 꿈이 찾아들었다
벽이 무너져 엉엉 우는 꿈
누가
벽을 부수었나 대체 누가
놀라 눈을 떴을 때
아침이 왔다 벽은
색색의 이지러진 얼굴을 감추며 어디론가 황급히 달아나버리고
누가, 그 누가
부른 적 없는 사랑이 쳐들어왔다
―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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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이 마음을 짐작할까? 벽이 위로가 되고 안심을 주는 순간의 어느 갈피 없는 마음을. 더이상 밖으로 마음을 내놓지 못하게, 더이상 밖으로 마음이 흐르지 못하게, 벽이 마음을 막아주고, 새근새근 잠이 들 때까지, 벽이 모로 누운 등을 토닥여준다. 참 다행이다. 세상에는 벽도 없는 곳에 누운 마음들도 많은데 말이다.
마음의 병을 얻은 후부터 잠을 뒤척이게 되었다. 매일 밤마다 잠을 새로 배우는 기분으로 뒤척인다. 그러다 벽을 등지면 어느새 마음에 고요가 생긴다. 더이상 물러나거나 도망칠 수 없는 막다른 마음이 생긴다.
"부른 적 없는 사랑이 쳐들어” 올 때까지는 말이다.
김병호
2003년 《문화일보》 등단.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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