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짝
김선태
다사로운 봄날 돌담 길을
늙은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가 꼬옥 팔짱을 끼고
서로 뭐라 뭐라 주고받으며 아장아장 걸어간다
순진무구의 시작과 끝인 저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이다
『짧다』, 천년의시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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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광화문 한복판에 이 시가 걸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좋은 시를 알아보는 맑은 눈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겨울 이 시집을 전해 받고 단숨에 읽으며 밑줄을 그어 놓은 작품이어서, 퀴즈 정답이라도 맞춘 듯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실직고하건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언뜻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당황했던 선명한 기억도 있다. 늙은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의 팔짱이라니. 어떻게 서로의 키가 맞을까 하는, 의심이 자꾸 기웃거렸다.
“꼬옥 손을 잡고” 쯤으로 표현했어도 되었을 텐데, 시인은 왜 “꼬옥 팔짱을 끼고”라는 무리한 표현을 썼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종일 이 의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에 직접 시인에게 물을까도 싶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무례한 일. 그렇게 애써 잊고 몇 날을 지내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는 세상을 선명한 사진만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것은 아닌지, 세상은 내가 그리는 그림이어야 비로소 내 것이 되는데, 남이 찍어 필터링한 사진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하고, 남이 쥐어 준 논리와 합리라는 도구적 잣대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려고 했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눈이 어두워 시적 장면을 놓치고, 삶이 각박하다는 핑계로 시심을 잃었나 보다. 그래서 나는 시인이 이야기하는 순진무구에서 일찌감치 멀리 벗어나 있는 사람. 할아버지와 손자가 손을 잡든, 한 걸음쯤 사이를 두고 걷든, 시인은 그 모습을 팔짱 낀 단짝 풍경으로 그려, 그들이 “서로 뭐라 뭐라 주고받으며 아장아장 걸어”가는 그림을 그려, 기꺼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텐데. 무슨 잘못 든 습관처럼 그림의 진경을 보기도 전에 시시비비를 가리려고만 했을까. 세상에 속지 않겠다는 전투적 자세로 오히려 황금비의 왜곡된 진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진 않는지, 조심스러워졌다. 다시금 순진무구의 시심으로 눈과 마음을 씻고 세상과 봄을 맞아야 할 것 같다. 저 이쁜 풍경에 나는 왜 스미지 못했을까.(김병호 시인)
김병호
2003년 《문화일보》 등단.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가 있음.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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