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병호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슈게이징』이 ‘시인의일요일시집’으로 발간되었다. 시집 제목이 눈에 뜨인다. ‘슈게이징’은 신발(shoe) + 뚫어지게 보다(gaze)의 합성어로, 1980년대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인디 록의 한 장르인데, 몽환적인 사운드 질감과 극도로 내밀하고 폐쇄적인 태도가 특징이다. ‘슈게이징’은 관객과 소통하려는 의지 없이, 죽어라 자기 발만 내려다보면서 연주하는 무대 매너이므로, 김병호에게 ‘슈게이징’은 시적인 것에 대한 자기 고집에 해당한다. 그 고집으로 인해 그의 시는 진한 서정의 맛을 오랫동안 자아내고 있다. 인생의 불가피한 리듬과 속성을 고스란히 환기하면서 감동적 떨림을 동반하고, 생성과 소멸의 무한 반복을 그려냄으로써 생의 질서를 미학적으로 기록한다.
김병호 시인의 이전 시집들은 비교적 감성적이고 개성적 이미지로 세상과 삶에 대한 깊은 시선을 보여줬다.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삶의 위안을 찾으려는 시적 자세를 갖추고 있어 독자와의 깊은 공감과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컸다.
이번 시집 『슈게이징』에서는 사랑의 본질과 그 안에서 감추어져 있는 감정에 대한 다양한 탐구에 집중한다. 사랑의 열정 대신 사랑이 지나간 자리의, 희미한 그늘과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통해 오히려 사랑의 깊이를 더 보여준다. 삶과 사랑의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 속에서 시인은 몽환적이고 내성적 감성으로 이뤄낸 독특한 흔적의 이미지들을 선사한다. 평범하지만 무관하지 않은 우리 삶의 풍경 속에서, 사랑의 불안과 고독 그리고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독특하고 감각적인 언술로 형상화한다.
그가 그려내는 사랑은 때때로 강렬하고 지독한 감정으로 나타나거나 예정된 운명과 같은 서늘함으로 표현되며, 때로는 큰 슬픔과 관련된 복잡한 감정을 동반한다. 사랑을 유난히도 지독한 마음의 일이라고 여기는 그의 시는, 사랑이 주는 아픔과 그로 인해 생기는 고독이 주요한 테마로 작용한다. 사랑에 대한 독특한 감정 표현과 심리적 깊이를 추구한, 시를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슈게이징』은 2024년 가을과 겨울에 특별한 선물로 다가갈 것이다.
한편, 지난 11월 16일 『슈게이징』 발간 기념 북콘서트가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북카페 <더프라이빗>에서 열렸다. 리호 시인의 사회와 임경묵 시인의 대담으로 이루어진 북콘서트에서 김병호 시인은 자신의 시 세계가 갖는 특징에 대해 흥미롭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시집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독자의 감상글도 소개했다. “이번 시집이 누군가를 울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성공”이라면 출간 소회를 밝혔고, “북콘서트가 이런 기분이란 걸 알았으면 진작에 한번 해볼 걸 그랬”다며 아쉬움을 비추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시인의일요일> 양정열 이사는 문학 관련 서적을 출간하는 <시인의일요일>이 ‘시인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시집과 산문집 등을 엄선하여 출간하고 있으며,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앉아서 받기>를 통해 독자들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다며 시인의일요일만의 시스템을 공개했다.
이날 행사에는 양산, 안동, 파주, 남양주, 보은 등 전국 각지에서 김명리 시인, 임재정 시인, 김기준 시인, 이기린 시인 등 수십 명이 참여하여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김병호 시인은 참여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더 좋은 작품을 써서 보답하겠다며 남다른 포부를 밝혔다.
<시집 속 대표시>
슈게이징
―그러다가도
김병호
가지에 고양이가 올라가 있습니다
짙고 막다른 골목입니다
당신은 그것이 권태와 연루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보내는 마음도 없이 목련은 떨어져 내립니다
아슬하게 당신을 건너보는 이유도
갓 익은 슬픔이 문밖에서 기다리는 이유도
더 이상 나의 소관은 아니랍니다
그러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도망치다 붙잡힌 발자국 같은 꽃잎들
가지 끌에서 고양이는 다 늙어버리고요
나는 어디로 스며야 할지를 몰라, 울음만 궁금합니다
어쩔 작정도 없이 당신 안부만 묻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도
잘못한 심부름 같아 마음을 꺼뜨립니다
―『슈게이징』, 시인의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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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게이징
―더 기다리면 안되나요
김병호
밤이 접혔습니다
이 밤은 또 누구의 빈집일까요
놀이터에 앉아 노래가 다 되도록
하늘을 당깁니다
그네는 표정만 간직하는 궤적이어서
곰곰하게 있으면
더 높게 차면서
더 깊게 헤어지는 일이
모과나무보다도 훌쩍 자랍니다
달을 지나쳐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겨울로 떠나는 밤입니다
발목을 내어줄까요
마음을 건네줄까요
반동으로 자라는 당신의 안부입니다
기다리는 일이 간곡해지면
다정할 때마다 도망치는 나쁜 버릇이 됩니다
조금씩 버려지는 마음이 자라면
밤마다 잠을 새로 배우는 기분이 됩니다
밤이 한번 더 접힙니다
그새 모과는 멍을 새기고
나는 당신이 올까 두렸습니다.
―『슈게이징』, 시인의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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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만 모르는 안부
김병호
막다른 골목
부딪친 뒷걸음질
어둠 속이면
더 잘 보이지
얼굴도 목소리도 없이
막 다다른 맨발
도망칠 수 없지
담장 밖으로 꺼낼 수도 없지
저만치에 멈춘
절름발이 고양이
한때, 고양이였던
아직, 검고 바싹한 고요
그걸 겨울
아니 우리라 할까
아프고
다정해서
밤이 되어도 거둬가지 않는, 입술들
밤새 덜컹이다 부러지는, 발자국들
다음에 이다음에, 라는 슬픈
연고 緣故가 없어 이제 저는 웬만합니다
―『슈게이징』, 시인의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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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게이징
―어쩌면 삼인칭
벤치에 앉아 자정을 지납니다
새로 생긴 주저흔이 반짝입니다
낮에 들린 병원에선 가슴 한쪽에 물이 찼다고 합니다
사주에 불이 많다던데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집은 아직, 멀리에 있습니다
이런 날은 자면서도 발끝을 오므립니다
오지 마, 여기서 기다려
당신은 꿈에서도 나를 길들입니다
당신에게 말을 배웠지만 사람의 요령은 알 수 없습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생을 이어 붙여봅니다
더 큰 울음을 지닌 이가 있어 이제 집으로 가야 합니다
집은 아직 멀리에, 있습니다
―『슈게이징』, 시인의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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