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13 _ 김일연의 「풍장」
풍장
김일연
윤기 도는 지렁이가 풀밭에 나와 있다
한참 지나 다시 봐도 가만히 누워 있다
햇볕에 몸은 마르는데 산세 깍깍 우는데
땅 위에
하늘 아래
장마 끝 환한 풀잎에
비이슬 묻어 있는 바람결 귀를 묻고
제 몸을 비우고 있는 크고 검은 지렁이
― 김일연, 『세상의 모든 딸들』, 서울 샐랙션,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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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는 축축한 흙 속에 있어야 사는데, 이 시에서 지렁이는 풀밭에 나와 있다. 햇살이 너무 강해 몸이 바짝 말라서 죽어가고 있다. 마치 바람에 장사 지내는 풍장風葬 의식처럼 보인다. 풍장은 보통 바람이 많고 건조한 지역에서 빈번하게 치러지는 경우가 많다. 바람은 무형․무색․무취의 존재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공허의 상징성이 있다. 바람이야말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데려가는 무형의 저승사자 같은 느낌이다. 바람이야말로 인간사가 덧없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아닌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통해서 이승의 생명은 저승의 세계로 건너간다. 바람에 의해 생명의 기운이 흩어지는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도 장풍藏風·득수得水·양지陽地를 풍수의 기본 조건으로 둔다. 첫 번째는 바람을 막는 것이다. 바람을 막지 못하면 기운이 흩어진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은 집터가 되었든, 무덤이 되었든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곳이 못 된다. 고층이나 언덕 위는 바람을 그대로 막기 때문에 풍수상 명당으로 보는 경우가 드물다. 바람이 침범하면 생명의 기운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바람이 죽은 시신을 데려간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존재가 죽은 시신을 가져가는 것. 자연으로 데려가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행위다. 지렁이는 햇볕에 말라 죽고 바람에 흩어지면서 결국 땅으로 돌아간다. 삶은 이런 반복의 연속을 통해,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항상 함께 흐른다. (이송희)
이송희
2003《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이름의 고고학』,『이태리 면사무소』,『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눈물로 읽는 사서함』,『길 위의 문장』,『경계의 시학』,『거울과 응시』,『현대시와 인지시학』,『유목의 서사』 등이 있다.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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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김일연 윤기 도는 지렁이가 풀밭에 나와 있다 한참 지나 다시 봐도 가만히 누워 있다 햇볕에 몸은 마르는데 산세 깍깍 우는데 땅 위에하늘 아래장마 끝 환한 풀잎에 비이슬 묻어 있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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