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포커스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14 _ 서숙희의 「종이컵 연애」

미디어시인 2023. 8. 28. 23:13

 

종이컵 연애

 

서숙희

 

만남은 간편했다

신용카드를 긁듯이

 

너무 얇은 네 뼈와 너무 흰 네 살결이

카페의 알전구 아래서 잠시 안쓰러웠지만

 

따스함은 손바닥, 딱 거기까지였다

가슴까지 오기도 전에 벌써 식어버리는

우리는 이미 일회성을 신뢰하고 있었다

 

플라토닉은 진즉에 플라스틱이 되었다

언제라도 버리고 언제라도 시작하는,

 

세상이 가벼워졌다

사랑이 편리해졌다

 

서숙희, 먼 길을 돌아왔네, 푸른사상,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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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많아지면서 시청자들은 타인의 연애를 관찰하며 로맨스를 대리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일반적이었다면 현재의 트렌드는 달라졌다. 이별한 커플들이 전 연인과 재회하거나, 실제 커플이 상대방을 바꿔가며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이 방영되기도 한다. 이처럼 각본 없는 관찰 연애 예능은 정형화된 클리셰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키웠다.

그러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썸을 타고, 어장 관리를 하고, 쉽게 헤어지는 것은 사랑에 대한 불확실성을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전문가들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한 가지 이유를 코로나19 이후 사회와의 단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성을 이유로 대면 만남을 조심했다. 특히 디지털 매체에 익숙한 MZ 세대의 경우에는 인터넷을 통한 비대면 접촉에 익숙하다 보니 대면 접촉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문제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몰입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 바로 가상 공간 속에서 남녀의 썸 과정을 지켜보는 세대들이 일종의 간접 연애 경험을 함으로써 타인의 감정에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서숙희 시인의 시 종이컵 연애세상과 사랑가벼워지고 편리해지듯 일회용 만남이 늘어가고 있는 현실을 곱씹게 한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연애관이 신용카드를 긁듯이간편해져서 쉽게 시작했다가 쉽게 끝내버리는 헐거운 마음처럼 취급될 수 있음에 우려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때때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목격되는 데이트의 중요성은 소비라는 키워드와 연결된다. 외모를 가꾸기 위한 미용, 패션, 운동, 식음료를 포함한 외식, 문화생활 등은 사랑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고민하게 한다. “플라토닉은 진즉에 플라스틱이 되어서 손쉽고 간편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가슴까지 오기도 전에 벌써 식어버리는타인과의 만남이 언제라도 버리고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는 흔한 것이 된다면 우리는 평생 사랑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얇은 네 뼈와 너무 흰 네 살결처럼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사랑의 욕구는 공허한 마음만을 불러올 뿐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고독한 인간 존재에 대한 해답이라고 정의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해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으며 주목할 수도, 파악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상대가 되어봄으로써 비로소 하나가 되는, 진정한 사랑의 힘이 절실한 시절이다. (김보람 시인)

 

 

 

김보람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모든 날의 이튿날, 괜히 그린 얼굴,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 연구서 현대시조와 리듬이 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유망작가에 선정되었다. 21세기시조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14 _ 서숙희의 「종이컵 연애」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14 _ 서숙희의 「종이컵 연애」 - 미디어 시in

종이컵 연애 서숙희 만남은 간편했다신용카드를 긁듯이 너무 얇은 네 뼈와 너무 흰 네 살결이카페의 알전구 아래서 잠시 안쓰러웠지만 따스함은 손바닥, 딱 거기까지였다가슴까지 오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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