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 언술과 실험적 화법, 서정적 미메시스의 조화
―김우 시인의 첫 시집 『치킨과 악마』 서정시학시인선으로 발간
하린 기자
2022년 계간 《시와 산문》 신인상으로 등단한 김우 시인이 첫 시집 『치킨과 악마』를 서정시학시인선으로 발간했다. 김우는 대기업 임원을 지낸 경험을 토대로 자기계발서인 『영업의 품격』과 『혁신의 품격』이라는 교양서적 두 권을 저술한 작가다. 그런데 순수 문학 장르에 도전하여 등단을 한 후 시집까지 발간하게 되었다. 시에 쓰여진 문장이 정확하고 생기가 넘친다. 기본 필력이 시집 속으로 그대로 스며든 양상이다.
제목이 독특하다. ‘치킨과 악마’. 궁금증을 유발한다. 1920년대 정지용이 미술의 인상주의와 문학의 이미지즘 등 모더니즘 기법으로 조국 상실의 슬픔과 우리 고유의 향토적 정서를 노래한 것처럼, 김우 시인도 세련된 언어를 바탕으로 전통 서정의 맥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도시 문명의 잔혹한 폭력성과 인간 소외의 실상도 냉철하게 그려냈다.
시집 1부에서는 문명의 폭령성과 현대인의 고독을 노래했고, 2부에서는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살고 있는 화자의 서정성을 구수하게 형상화했다. 3부엔 종군 위안부와 세월호 그리고 5.18 민주항쟁 등 시대정신을 반영한 시들을 배치했고, 4부엔 아버지와 어머니를 표본으로 인간의 원초적인 삶에 대한 탐구를 통해 얻어진 시들을 수록했다. 5부엔 기억에서 추억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을 동반한, 내면적 결을 품은 시들을 포진시켰다.
해설을 쓴 이병철 평론가는 김우의 시가 “서정의 구성 원리를 따르면서도 문장과 행간에 내재된 날카로운 응시의 힘”을 가지고, “주체와 대상 사이의 화해가 아닌 불화와 균열, 갈등의 양상을 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낭만적 자연이 철거된 폐허 위에 건설된 도시라는 작위적 세계의 반영과 재현에서부터 모던한 서정 혹은 반동일성의 서정이라는 역설적 수사를 떠올리게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이번 시집에 나타난 모티브의 다양성과 진정성도 높이 평가했다. 서정성에 바탕을 둔 모티브도 많았지만, 김우만의 참여 정신이 반영되어 일제 강점기, 4.19혁명, 5.18민주항쟁, 세월호, 이태원 참사, 태양광, 보이스피싱, 다문화 가정, 독거노인, 취준생, 비정규직 문제 등도 기꺼이 시의 중심부로 끌고 왔다. 그 대신 그것을 허투루 다루지 않고 내밀하게 진실되게 그려냈다.
표4를 써 준 이승하 시인은 “김우 시인의 시는 섬세한 서정소곡이 아니라 자연의 웅장한 교향곡이다. 때로는 우렁차고 때로는 직설적이다. 많은 시인이 소통 불능의 방에서 칩거하고 있는 이때, 김우 시인이 들려주는 노래는 알아들을 수 있어서 좋고 힘차서 더욱 좋다.”라고 하며 시원시원한 시상 전개와 우렁찬 목소리를 높이 평가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얼음 같은 피는 여전히 붉고
김우
내가 여태껏 살아온 세상
내가 지금까지
버텨온 이유,
이젠 탐미를 끝낼 때다
살아냈던 시간이
살아가야 할 시간으로 죽어간다
말(語)을 사랑했던 기억을
잃어버린 단어에 가둔다
그래도
죽어도,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
오늘밤
한 줄의 시를 쓰기 때문
아름다운 밤에
아름드리 바람이
아스라한 유성의 말(語)들을 데려온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뭐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난,
세상의 낙오자
이토록 쓰라린……구멍 난 하늘
원뿔처럼 말아 올린
새들의 울부짖음
지쳐가는 자동차 경적 소리
동요하는 만년필
시인의 심장에
펜촉이 묘비처럼 박히고,
냉정한 핏물만 여전히 붉다
―『치킨과 악마』, 서정시학,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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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김우
초유를 물리던 그날처럼
갓 쪄낸 술빵 뭉치들이 주렁주렁 걸린
복숭아나무 아래 바람을 베고 눕는다
파란 하늘을 한 입 베어 물면
복숭아 시럽이 뚝 뚝 떨어질 거 같아
0.1g의 솜털에도 젖은 기침이 저절로 열리는 아침,
투전판을 무겁게 짓누르던 담배 연기처럼
하룻밤새 허공으로 흩어진
우리집 과수원
어머니는 주인 바뀐 과수원에서
땀 젖은 머릿수건을 하루 종일 둘렀다
아버지가 노름으로 날린 과수원의 품삯 호미질보다
더 흥건한 원망을 밤새 잠꼬대처럼 내뱉으며,
한때는 희망 한때는 달콤함 한때는 원망
그렁그렁 달린 복숭아들
올해도 어머니 한을 먹고 탐스럽게 달렸다
그럴수록 복숭아나무 그늘 한쪽에는
배배 엮인 미움들이
아버지를 멍에처럼 끼우고 벗기고, 또 끼우곤 했다
달콤한 복사꽃 향기로 젖을 빨던
아이의 까만 눈동자로 익히던
복사꽃 환한 밤
어쩌면
잃어버린 시간처럼 껍질을 벗겨선 안 되는
복숭아처럼,
―『치킨과 악마』, 서정시학,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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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구슬, 택시 운전사
김우
울음이 출렁거리는 밤하늘, 밤바다에는 박쥐처럼 매달린 동굴이 있어요. 별이 사라진 밤이면 둥근 입구가 열려요. 한 달에 한 번 허공에서 밀물이 되지 못한 커다란 동공들. 자전거로 건너다보면 터널증후군이 생각나요. 온종일 운전대를 돌리는 부르튼 손목들.
골목에서 동심을 굴리던 왕구슬만큼 늠름한 것을 본 적 있나요. 지친 해가 서녘 끝으로 주저앉을 때까지 엄마의 부름은 스밀 틈조차 없어요. 도르륵, 왕구슬이 수챗구멍으로 사라졌어요. 눈부신 방과 후를 단숨에 삼킨 블랙홀 앞에서, 으앙 울음을 터트려요. 어둠은 빛을 기르는 성장통인 걸 그날 인식했죠.
별을 머리에 이고 달을 어깨에 지며 아버지는 단단하고 억센 원을 굴렸어요. 금정산을 받치는 아스팔트 배수로에 잘 마른 헛기침이 차곡차곡 쌓이면, 트고 갈라진 손으로 무거운 삶을 택시에 싣고 달렸죠.
낡고 찌그러진 동굴 가득, 막걸리를 채우고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 요금 미터기를 꺾을 때 제일 신난다 했어요. 왕구슬의 실종만큼 굳은 마디가 되어 버린 아버지 손가락 굳은살들. 어쩌면 달력 속 날짜들이 죄다 죽어서 생긴 무덤이에요.
암막 커튼 사이로 출렁이는 밤바다를 올려다봐요. 보이지 않는다고 소멸된 것은 아니죠. 동굴의 입구가 막힌 밤하늘 아니 바다에는 희끗희끗한 수염 달린 왕구슬이 주인을 찾고 있어요. 굽을 대로 굽은 등은 얼마나 더 저물어야, 어린 골목을 저 동굴에서 꺼낼 수 있을까요.
이 밤 둥근 마법으로 풀려 난 당신이 그때의 소년으로 전송됩니다.
―『치킨과 악마』, 서정시학,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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