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인이 등단 35주년에 펴낸 ‘연둣빛 시절’의 시 모음
― 시선집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에 실린 마음을 움직이는 시들
하린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가능주의자』와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문명의 바깥으로』, 산문집 『반통의 물』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저 불빛들을 기억해』 『예술의 주름들』 등을 출간한 나희덕 시인이 시선집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수오서재, 2024)를 발간했다.
이 시선집엔 ‘젊은 날의 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 이유는 첫 시집 『뿌리에게』부터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에 이르기까지, 초기 시집 여섯 권에서 시인이 직접 고른 시들을 한데 묶었기 때문이다.
나희덕 시인에게 ‘젊은 날’은 어떤 의미이고 어떤 시공간일까? 시인이 산문에서 밝힌 대로 “어두운 허공에 드러난 뿌리처럼 갈증과 불안에 허덕이던” 날들, “시인으로서는 가장 파닥거리며 살아 있었던 시기”, “방황과 해찰의 시간, 상처받고 혼란스러운 현실”의 시간, “모든 것이 낯설고 혼자라는 상념에 빠져 있던 날들”, “미뤄둔 질문들과 맞닥뜨린 경험이, ‘꽃인 줄도 모르고 잎인 줄도 모르고 피어 있던 시간”일 것이다. 그러한 맥락들이 오롯이 녹아 있는 투명하고 깊은 시 50편이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에 담겼다.
시선집 안에서 「땅끝」, 「푸른 밤」, 「방을 얻다」, 「음지의 꽃」, 「뿌리에게」, 「귀뚜라미」,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일곱 살 때의 독서」, 「섶섬이 보이는 방」, 「그런 저녁이 있다」, 「어떤 출토」 등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시들이다. 그러니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친 사람이라면 그의 시를 한 편도 읽지 않고 어른이 되기란 쉽지 않다. 그의 시를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의 방향성을 스스로 찾게 되고 그윽한 언어의 참맛이 내면에 꺾꽂이되듯 심어진다. 그로 인해 자아의 정신적 성장과 세계관이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도 공감이 가는 시들이 있다. 나희덕의 시가 그러하다. 그는 소외되고 아픈 사람과 끝없이 추락하는 세상을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사유와 생태적 감수성, 사회구조의 불합리함과 불평등, 삶의 모순과 서글픔을 담아내면서도, 그 안에서 따뜻한 어머니의 목소리로 사람과 세상 모두를 감싼다.
발문을 쓴 안희연 시인의 말처럼 나희덕의 시는 ‘잠 못 이루는 고통과 혼돈의 날들 속에서도 또박또박 사랑을 말’하며, ‘죽음의 악력에 끌려가지 않고 기어코 삶 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해내는 시’다. 시 읽기의 즐거움을 처음 느끼기 좋은 무해한 영혼들에게, 스무 살에 읽었던 시집을 마흔에 다시 펼칠 이들에게, 연둣빛 청춘의 시기를 통과하는 이들에게 이 시선집은 오랜 친구처럼 곁에 자리할 것이다.
<시선집 속 시 맛보기>
허공 한 줌
나희덕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 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 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 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수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 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 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수오서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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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도에서는
나희덕
종합병원 복도를 오래 서성거리다 보면
누구나 울음의 감별사가 된다
울음마다에는 병아리 깃털 같은 결이 있어서
들썩이는 어깨를 짚어보지 않아도
그것이 병을 마악 알았을 때의 울음인지
죽음을 얼마 앞둔 울음인지
싸늘한 죽음 앞에서의 울음인지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복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울음소리가 들려도 뒤돌아보지 말 것,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은 것처럼 앞으로 걸어갈 것
마른 시냇물처럼 오래 흘러온
이 울음의 야적장에서는 누구도 그 무게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수오서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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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놓은 스타킹
나희덕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생生의 얼굴은 총총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끄러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 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 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수오서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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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 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배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수오서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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