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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지구에서 피워낸 섬세한 시의 문양

미디어시인 2024. 9. 21. 15:28

이승희의 네 번째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문학동네시인선으로 발간

 

 

하린 기자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승희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를 문학동네 시인선으로 발간했다. 이승희는 첫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 2006)에서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하는 슬픔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두 번째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문학동네, 2012)에서 맨드라미로 대표되는 식물의 이미지와 일상의 풍경들을 통해 슬픔에 대한 더욱 깊어진 고찰을 보여준 바 있다.

이승희는 세 번째 시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문예중앙, 2017)으로 전봉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사물과 사람이 언제 문학을 포옹하는지, 문학은 어떻게 사물과 사람을 끌어당기는지에 대한 답을 기대할 수 있는 시라는 평을 받았는데, 시인의 원숙한 시 세계로의 확장을 예감하게 했다. 그 이후 8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어두운 곳을 들여다보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슬픔과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특히 수몰지구에 대한 시들은 같은 모티브로 창작된 기존의 시와는 차별화된 상상력을 선보이는데, 생명력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식물의 이미지와 섬약하고 민감한 감성이 만나 형성된 감수성은 이승희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시선을 나타낸다.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표제만 읽어도 물속을 오래도록 가만히 들여다보는 화자가 떠오른다. 화자는 물을 수몰을 주도한 갈등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온몸으로 물을 받아들인 채 슬픔과 그리움의 진원지를 원형적 공간으로 전환한다. 슬픔과 그리움이 물의 속성과 닮았다고 여기는 듯 축축하고 물기가 묻어 있는 것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펼쳐 나간다. 그로 인해 화자는 물속에도 꽃을 피우고 나비가 날게 하고 나뭇가지와 더불어 물고기가 자연스럽게 노닐게 만든다.

이처럼 시인은 슬픔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픔에 깊이 빠져듦으로써 그 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해 내는 초연하고도 성숙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어차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수몰이라는 슬픔의 근원을 갈등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리움과 슬픔의 원형 공간으로 치환해 새로운 감수성의 자리를 창출한 것이다.

때론 슬픔을 온몸으로 껴안을 때 본질로부터 미학적 지향점이 발생한다. 그래서 슬픔에 함몰되지 않고 슬픔을 밀고 나가거나 반려로 생각하는 섬세한 감수성의 시가 창작되게 된다. 섬세한 슬픔과 그리움을 시에서 만나고 싶은 독자들에게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는 크나큰 선물이 될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이승희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작약이 아닌 것들만 가득했다

죽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거기와 이곳의 사이는 없고

환상이라고 말하면 이미 환상이 아닌데

 

여기는 한 번쯤 죽어야 올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물고기가 바라보는 곳을

새 한 마리가 바라본다

나도 그곳을 바라본다

모두 다른 곳인데 한 곳에 있었다

 

작약은 거기 있다

허공에 뿌리를 두고

꽃을 물속에 두었다

누가 밀어 넣었을까

누가 밀어 올렸을까

어떤 반성과 참회가 꼭대기를 흔들었다

 

무수하게 산란하는 물고기들이

내 얼굴을 스쳐 간다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이 모든 게 작약이 되는 날이 온다는 말을 이제 믿지 않는다

치욕스러웠고

슬펐다

 

반복되는 작약

 

피가 물속으로 퍼져갈 때 작약꽃이 피었다

 

나는 집을 만들 손이 없었다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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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면

 

이승희

 

아무 말 없이 헤어진 사람이 생각났다 누군가의 무덤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물속에서 꽃이 핀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으로 나는 지금 물 앞에 앉아 물을 보는 마음을 생각한다 나와 그 마음 사이로 나비 한 마리가 물속을 날아간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바람이 부는 것처럼 그건 그냥 그런 것이다 모든 아픈 것들은 다 그렇다 아무 말이 없다 그걸 다 알 것 같으면 정말 아픈 것일까 더는 통과할 문이 없다고 생각해도 새로운 철문을 몇 번씩 열었다가 닫는 마음이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이 있을 때 나는 작약의 잎을 세고 있다 꽃이 피겠구나 안 피겠구나 몇 해째 꽃이 오지 않았다 그 마음을 생각한다 나는 이 세계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너무 많은 날이 지났다 비가 다녀가고 바람이 불었고 함박눈이 몇 번이나 내렸는지도 모른다 마당의 나무들은 제 가지 속에 물고기를 품으며 잠들었고 잠이 오지 않는 나는 그 주변을 밤새 돌아다녔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아는 것들이 사라지고 모르는 것들이 다가와 같이 살게 되어도 그건 그냥 모르는 것들 모르는 것들이 아는 것들을 이길 수 있을까 모르는 것들이 아는 것들을 닮아간다 나뭇잎들이 물속에서 떨어진다 계단을 내려가듯 가라앉는다 물고기의 집이 될 수도 있다 많은 알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럴 때도 눈물은 중력을 거슬러 올라간다 나의 두 눈까지는 그래도 아직 멀었다 멈추지 않았으므로 알 수 있다 물속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면 나는 어쩌면 아직 살아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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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을 걸으면 물속을 걷는 사람이 생겨난다

 

이승희

 

여기에서 계속 살 거야?

 

물고기 한 마리 자꾸 따라온다

 

 

 

똑같은 물음

똑같은 대답을 하며

나란히 나란히

 

같이 살 생각도 없으면서

같이 죽을 생각도 없으면서

하나의 풍경이 된다

 

지나가는 풍경으로부터

아무도 없는 풍경까지

 

풍경은

조용히 있다

조용히 흐르고 있다

 

나는 지나가는 중이고

지나가는 풍경이 된다

사라지고 나면

사라진 풍경이 된다

 

여기에 살기로 작정하면

저기가 생겨난다

 

여기 없는 저기와

저기 없는 여기가 없다고 해도

 

집에 가자라는 말을 들으면 자꾸 눈물이 났다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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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 기자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승희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를 문학동네 시인선으로 발간했다. 이승희는 첫 시집 『저녁을 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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