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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내면에 부재하는 당신

미디어시인 2024. 12. 17. 13:50

장서영 시인의 첫 시집 시럽과 각설탕 사이시인동네 시인선으로 발간

 

 

김분홍 기자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장서영 시인은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아동문학연구소를 통해 동화로, 2020열린시학신인작품상을 통해 시로 등단했다. 동화집으로 춤추는 작은 불꽃이 있으며 제7아름다운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이번에 첫 시집 시럽과 각설탕 사이가 시인동네 시인선으로 출간됐다.

 

불안한 나와 헤어지기 위해/끝없는 동어반복과 허밍들/시집으로 들어가/혼자 중얼거리는 시인의 말을 읽다 보면 시인의 내면에 부재하는 당신을 시집 군데군데에서 만날 수 있다. 이는 분열자의 고독한 내면이라는 제목의 신상조 문학평론가의 시집 해설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렇다면 장서영 시인의 고독한 내면에 부재하는 당신은 어떤 존재일까.

 

시집은 누군가를 향해 자꾸 흔들리열여덟 살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김소월의 시에 무수하게 출몰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처럼 장서영 시인의 시집에도 부재하는 당신이 출몰한다. “당신은 없고/ 당신이 쓰던 컵만 남아 입을 벌리고 있어서/ 병들고 혼자 남겨진 나를 위해/ 허무만 왈칵왈칵 쏟아져 나왔”(녹즙기 on, 당신 off)지만 당신 없는 식탁에 차려놓을 감정들”(봄밤)만 남아있게 된다. 그래서 화자인 나는 당신과 관련없는 것들을 아는 척하지만” “수심(愁心)만을 들키고, “관찰자가 되어 물속으로 들어가는 당신을 상상”(관찰자의 기분)한다.

 

여기서 장서영 시인의 당신은 세 명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언니이다. “아직도 붉은 구름 속에 숨어 있어요/ 도르르 놓쳐버린 언니의 시간”(토마토)기울어진 날씨가 의상이 되어/ 밖으로 나오라고 외친다(함박눈의 시그널). 두 번째는 엄마다. “하루 세 번 만나는 치약보다 한 달에 세 번도 못 보는 엄마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하고 정반대의 농도를 가진 사람일 거야.”(튜브의 아침)라고 엄마의 존재 이유를 언술한다. 세 번째는 아버지다. “신음으로 다가온 시간 변덕스러운 날씨에 모슬포 플랫폼이 내 안으로 들어왔어요. 아버지는 껍데기도 속살도 전부 버리고 다른 공간으로 떠났어요.(모슬포 플랫폼)라고 하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결핍을 토로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럽과 각설탕 사이는 예민한 표정 뒤의 고통스러운 내면으로 요약”(신상조 문학평론가) 되는 당신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 원인은 시인의 고통스러운 내면에 부재하는 존재들에 대한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핍을 메우기 위해 당신과의 사이에 시럽을 넣을까 각설탕을 넣을까 고민하는 사이, 시간이라는 적립금만 쌓인다. 포인트를 쌓다 보면 암울하고 부조리한 현실 또한 지나갈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토마토

 

장서영

 

언니는 세모가 아니에요

네모는 더더욱 아니고요

언니는 그저 붉었을 뿐이에요

 

세모와 네모와 어울려도 괜찮았을 빨강

 

토마토를 따고 있어요 시간이 함께 붉어졌어요

붉은빛과 흥얼거림이 바구니에 가득 찰 때

머리 위를 빙빙 맴도는 솔개에게 말도 걸었어요

 

구름과 연애를 하는 언니가 가끔 보였고요

 

구름 저편에 뭐가 있는 줄 아니?

자꾸 구름의 감정이 몰려와

가만가만 붉은 토마토를 만질 때

뭉클한 언니

완숙한 언니

 

도르르 굴러가는 언니의 오후

 

언니는 언제부터 이 세상에 없는 토마토를 길렀을까요

언제부터 환부가 생겼을까요

까망도 이해하고

하양도 사랑했던 언니

 

넝쿨 뒤에 숨은 작은 열매처럼

아직도 붉은 구름 속에 숨어 있어요

도르르 놓쳐버린 언니의 시간들

 

헝클어진 감정이 모여 이야기가 맺히듯

방울방울 토마토 안쪽 여린 숨소리가

언니의 일기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어요

― 『시럽과 각설탕 사이, 시인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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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의 시그널

 

장서영

 

어떤 과잉이 춤을 춘다

덮어버릴 듯 쏟아지는 폭설처럼

저 호들갑스런 자세들

 

쏟아진다와 덮어버린다는 비슷한 목적을 갖고 있다

나뭇가지에 엄살이 하얗게 얼어붙어

어찌 보면 농밀하고

어찌 보면 폐쇄적인 유대감

 

외투를 입고

기울어진 날씨가 의상이 되어

밖으로 나오라고 외친다

 

밀폐와 은폐를 반복하는 일상 속으로

궂은 눈이 너무 많이 내렸지만

나는 가만히 파묻히기로 한다

한꺼번에 쏟아진 눈을 맞으면 무덤 같다

밖으로 나와도 여전히 위리안치가 된다

 

눈이 녹기 시작하면 온갖 질문이 흘러내릴 거다

녹아내리는 것들은 그 어떤 상징도 아니니

하얗게 엉겨 붙던 외로움쯤으로 해석하면 그만이다

나는 또다시 1인칭 시점으로 젖어 들었다

눈길 위에 눈길 조금씩 내려놓으며

아무도 몰래 외출을 잠근다

― 『시럽과 각설탕 사이, 시인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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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럽과 각설탕 사이

 

장서영

 

나는 하우스 스타일을 주문하고

그는 콜롬비아 원두를 선택했지

케냐산 AA 30%, 에티오피아산 50%, 콜롬비아산 20%

그래도 20%는 같은 취향이라고

그가 너스레를 떨었지

 

그와의 사이에

시럽을 넣어야 할까 각설탕을 넣어야 할까

단맛에도 국경이 분명 있을 텐데

우리는 언제나 달달한 대화를 매듭지을 수 없었지

헤어지지 못하고 20%에 얽혀 있는 기분

 

내가 다른 나를 꿈꾸고 있다는 것

또 다른 나를 감당하는 것

 

달콤한 즙이 되거나 훼손되지 않는 표면이거나

같거나 다른 서로의 스타일

시럽과 각설탕만이 알고 있겠지

― 『시럽과 각설탕 사이, 시인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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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내면에 부재하는 당신 - 미디어 시in

김분홍 기자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장서영 시인은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아동문학연구소》를 통해 동화로, 2020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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