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 사이, 비명과 침묵 사이, 당신과 나 사이 흘러넘치는 감정과 생동하는 시어들
―김근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에게서 에게로』 문학동네시인선으로 발간
하린 기자
예측 불허한 상상력과 살아 움직이는 리드미컬한 시어들로 우리를 사로잡았던 김근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에게서 에게로』를 문학동네시인선으로 발간했다.
김근은 그동안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운율감 있는 시어, 그리고 다층적인 아이러니와 상징 등을 통해 개성 넘치는 시 세계를 펼쳐왔다. 첫 시집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에선 도발적인 이미지로 신화적 상상력과 유년의 기억을 풀어냈고, 두 번째 시집 『구름극장에서 만나요』(창비, 2008)에서는 탄생과 죽음이 뒤엉킨 기괴한 설화들을 적극적으로 가져와 더욱 강렬해진 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세 번째 시집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문학과지성사, 2014)에서는 비일상적인 이미지들로부터 일상의 풍경을 환기하는 시들을 통해 마치 생생한 악몽처럼 독자들을 압도했다. 서라벌문학상 수상작인 네 번째 시집 『끝을 시작하기』(도서출판 아시아, 2021)에서는 한 마리의 짐승이 출현하여, 짐승과 함께 달려 나가는 타자화된 욕망을 제시했다.
네 번째 시집 이후 삼 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흥미로운 점은 명확한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인은 정체가 불투명한 화자의 목소리로 특정 단어나 문구를 반복함으로써 혼란스럽고 불안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다. 그러한 특징 때문에 조강석 평론가는 해설에서 『에게서 에게로』는 “불명과 미상 그리고 흐름 속에 있다. 대개의 시에서 발화자의 윤곽조차 종잡을 수 없고 시가 발화되는 장소 역시 특정할 수 없다. 누가 누구에게 어디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명료하지 않고 발화자의 신원은 미상이다. 더욱이 발화된 음성조차 분명하게 분절되지 않고 때로는 소리가 혀 속으로 말리고, 때로는 반복되며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발성된 소리조차 계속 흐름 위에 있다는 말이다.”라고 분석했다. 이는 화자 설정과 그 안에 담긴 목소리에 대한 김근만의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런데 김근의 시도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처음부터 끝까지 매끄럽게, 친밀하게 읽힌다.
메시지와 시적 요소 측면에서 『에게서 에게로』는 빛과 어둠 사이, 비명과 침묵 사이, 당신과 나 사이 흘러넘치는 감정과 생동하는 시어들로 가득 차 있다. 대척점에 있는 자리를 끊임없이 오가며 매력적인 이미지의 흐름을 보여주는 시들로 인해 독자들은 오랜만에 상상과 감각을 즐겁게 느끼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가려진 문장
김근
멀리서 꽃 졌다는 소식이 오고 네 얼굴 지워질 것 같은 기분으로, 미처 가보지 못한 곳에서 꽃들 만개했다 져버리고 빛깔도 이름도 끝내 알지 못하겠는데 멀리서 흐려진 마음이 오고 네게 얼굴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만 지워질 것 같은 기분으로, 바람 불고 멀리서 비 몰아오고 얼굴이라는 말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네가 내 쪽으로 돌아누울 것만 같은 기분으로, 이제 너를 어떻게 알아보나 얼굴도 없이 너는 나를 어떻게 알아보나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요 물으면 모르는 사이가 비로소 생겨나고 너는 너라는 지칭도 잃고 아득해만 져버릴 것 같은데 그제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와락 껴안고 쓰다듬고 키스를 그러나 키스할 얼굴을 끝내 찾지 못하고 내 얼굴도 그만 지워지고 말 것 같은, 모르는, 얼굴 없는 내가, 모르는, 얼굴 없는 너의 볼모가 될 것 같은, 그러다 내쳐지고 그러다 패대기쳐지고 그러다 매달리고 울고불고 할 것 같은 기분으로, 내가 도무지 남아나질 않아도 이 생면부지의 닿을 수 없는 시간의 진창에서 발이 빠지며 도무지 한 발짝도 그쪽으로는 내디딜 수 없는 자세로 이런 막다른 슬픔이 어떤 슬픔인지도 오직 모른 체 너에게 가야 한다는 가서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만 남아 허우적거리며 생면부지 이전과 이후의 아득한 경계에서 못 알아본 너를 어쩐지는 알아본 적이 있었을 것만 같다는 가려운 기분으로, 아무리 긁어도 긁어도 긁힌 자국에 피가 배어나와도 가려움 좀처럼은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우리가 아는 몸인가요 물으면 몸만으로 멀리서 꽃 졌다는 소식이 오고 난데없는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으로,
―『에게서 에게로』,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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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줏빛 심장에 대고
김근
자줏빛 심장에 대고 자줏빛자줏빛 말하지 하 하지 건너가지 못하는 가슴 박동하지 못하는 자줏빛자줏빛 어린 어둠들이 아직 거기 자라고 있는가 자라서 어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줏빛자줏빛 피부를 이루는가 심장이 자줏빛자줏빛 알 리 없고 자줏빛은 왜 자줏빛자줏빛 자줏빛인가 심장은 새여서는 안 되는가 사내에게 자줏빛자줏빛 사내여서는 안 되는가 하고 묻는 것과 같이 좀처럼 비려지지 않는 나는 말하고 말하지 말 말 말 하지 하지만 자줏빛자줏빛 태어나기만 하는 바람들과 어린 어둠들에 줄을 대고 있는 것이 분명한 피부들과 자줏빛자줏빛 아직 살고 있다는 무서움과 목책들 자줏빛자줏빛 토라진 나무들과 마른 겨울 산등성이 자줏빛 얼어붙은 엄마 맘 마 마 자줏빛자줏빛 심장에 심장에 대고 자줏빛자줏빛 입술을 벌려 오래 오래 오래 오래 전 숨겨둔 오후들과 구더기 들끓는 당신과 당신과 당신과 끝나지 않는 자줏빛자줏빛 당신과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알아도 안다고 뱉어지지는 않는 어깨들을 꺼 꺼 꺼내려고만 상처 난 맨발로 자줏빛자줏빛 밟고서만 서서만 자줏빛 심장에 대고 대고대고 아이고 대고 자줏빛자줏빛
―『에게서 에게로』,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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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푸레
김근
어슴푸레 어슴푸레로 어슴푸레이기만 어슴푸레 다시 잠이 깨어 어슴푸레 잠 깨이면 어슴푸레푸레로만 잠인지 아닌지 생시인지 아닌지 어슴푸레, 어슴은 떼어내고 푸레일 것만 같이 해가 뜨는지 해가 지는지 잠 깨어 보면 어슴, 푸레가 떨어진 어슴인 것만 처럼 여자 돌아오고 어슴어슴, 푸레 어디서 물소리 아득하고 날 흐려지고 까무룩하고 다시 잠들고 까무룩히 잠 깊어지고 까무룩 까무룩 여자 떠나가고 까마귀떼 하늘 가득 날아 나는데 날 어두워지고 휘적휘적 치마 퍼드덕이며 날 듯이만 가는데 여자 가서 아주 안 돌아올 것처럼 돌아보지는 전혀 않고 뒷모습으로만 어슴푸레, 어슴푸레해만 지고 붙들려 손이 나는 손이 붙들려 따라나서지는 아주 못하고 까무룩 까무룩 잠만 들고 잠귀신마냥만 까무룩 까무루룩 잠만 깨면 어슴푸레 눈곱 말라붙어 눈 안 떠지고 여자 돌아오는데 영영인지 아닌지 어디서 빨래소리 흰 빨래 검어지지 않고 검은 빨래 희어지지는 끝끝내 않고 찰박찰박 빨래소리 여자 돌아보는데 찰박찰박찰박, 빛도 없이 찰박찰박찰박찰박, 물소리 빨래소리 까무룩 까무룩 까까무룩 아무리 몸을 뒤집어도 어슴푸레, 어슴푸레만일 뿐 여자 돌아 돌아보는데 무서 무서 무서운데 앞모습으로만 어슴푸레, 깨지나 말걸 깨지나 깨지지나 어슴푸레로 말걸 잠인지 생시인지 깨도 깨도 잠속이고 아슴아슴 뒷모습인지 앞모습인지 무서 무서 무서운데 어슴푸레 자도 자도 자도 생시라 어슴푸레, 어슴푸레로나만 다시 하릴 없이 잠에 들고 잠 깊어 어슴푸레 잠 깊으면 여기인지 거기인지 까무룩 까무까무룩 여기가 거기인지 그때가 지금인지 어슴푸레, 푸레나푸레 푸레푸레일러나
―『에게서 에게로』,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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