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시in〉 초청 리호 시인 북토크 ‘이상하고 아름다운 리호의 세계’
― 신간 시집 『설탕이니까』(시인의 일요일, 2025) 출간 기념

하린 기자
2014년 《실천문학》 제3회 오장환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리호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설탕이니까』를 발간했다. 10여 년 전, 시단의 이단아처럼 등장한 리호의 시세계는 마법적 상상력을 통해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개성적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세간의 평을 얻었다. 이번 시집 역시 시집 전체에 흘러넘치는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다양한 표현기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보헤미안의 노래를 듣는 듯,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 도달할 것이다.
그의 거침없는 상상력은 동서양을 가로지르고 시간을 넘나들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건과 현상을 삶의 경험과 분리하지 않고 한데 모아 이미지화한다. 한 곳에, 한 시간대에 머물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행보는 우리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이상하고 아름답고 충격적인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 그러므로 『설탕이니까』는 이상하고 별나지만 아름답고 신비한, 리호 세계의 축소판인 셈이다.
현실의 삶이 꼭 현실만은 아닌 것처럼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수수께끼같이 이상하고 재밌는 세계는 리호 시인이 독창적이고 강렬한 사랑으로 그려낸 매력적인 세계이다. 특별한 의도나 정답이 없는 세계가 그려내는 환상과 상상은 언뜻언뜻 보이는 삶의 굴곡과 비범한 아우라를 암시한다. <미디어 시in> 그런 리호 시인만의 독특한 채색과 음영이 그려진 시 세계를 현장에서 확인하기 위해 2025년 4월 12일 13시 30분~ 15시까지 신도림역 가온대회의실에서 북토크를 개최했다.

축사(김병호 시인, 조명 시인)와 시집 속 시 읽기(허향숙 시인(낭독), 김자숙 시인(시극)), 북토크(진행: 최은묵 시인), 사인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리호 만의 시 세계에 매료된 시간을 가졌다.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최은묵: 첫 시집 『기타와 바게트』가 이전의 문법에 상징으로 균열을 일으키려는 시도였다면, 이번 시집 『설탕이니까』는 상징마저도 건너뛰려는 새로운 보폭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저는 그것을 ‘스스로 파동을 일으키는 시’, 정리해서 ‘슈거리즘(sugarism)’이라고 명명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시집 제목을 어떻게 정하신 건지?’부터, 시집에 대해 전체적인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리호: 저의 시 쓰기의 모토는 ‘다 같이 잘 살자 동네 한 바퀴’입니다. 잘 살려면 잘 먹어야 하고 잘 먹으려면 잘 만들어야 하고 잘 만들려면 설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설탕이니까 그나마 먹을 만한 시를 짓고, 그나마 자고 그나마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말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리호 시가 그렇지 않을까요? 무슨 말인지 모를지라도 ‘달지만 쓰구나’ 혹은 ‘짜지만 달구나’ 하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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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묵: 시집을 읽으면 여러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데요. 저릿한 느낌을 건네주는 「숭어」라든가, 시인이 독자와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소금 팝니다」, 그리고 표제작으로 쓰인 「설탕이니까」나 「특이한 계란 한 판」,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근의 공식」처럼 공동체에 담론을 던지는 시도 많고요, 그 외에도 여러 화두가 다양한데요.
시인이 시집에 담아놓은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가 시집을 읽을 때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지 한두 가지 추천해 주시길 바랍니다.
리호: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는 시집을 고를 때 시집 속 시를 소리 내어 읽습니다. 처음 읽는 시임에도 잘 읽히는 시가 있습니다. 굳이 추천하자면 저는 그런 시집을 추천합니다. 잘 읽힌다는 게 꼭 텍스트 해석이 잘 되는 시는 아닙니다. 이제 반대로 독자가 제 시집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노하우를 알려드리자면, 그냥 간단합니다. 세상에는 인간과 파인애플과 리호가 있다고 그냥 전제를 깔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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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묵: 『설탕이니까』는 눈여겨 볼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수록된 시 제목의 길이인데요. 가장 긴 제목은 「첫눈을 놓치고 버스를 버리고 전화벨을 무시하고 신발을 사고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지고 최종면접에 지각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내 집을 없애고」인데요. 몇 글자인지 아시나요?
이 작품에 대해, 왜 이렇게 제목을 길게 썼는지, 세상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었는지 간단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리호: 쓰다 보니 그리되었어요. 시 쓰기가 그렇잖아요. 내 맘대로 써지는 시는 없고, 또 내 맘대로 안 써지는 시도 없고, 고된 세상살이가 저리 긴 문장으로 표현된다는 것이 시의 힘이 될 수도 있고, 굳이 구구절절 쓰지 않아도, 간판 보면 문 열고 들어가지 않아도 다 알 수 있고, 어떤 음식을 파는지 어떤 공연을 하는지, 가끔 아주 가끔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시인 듯합니다. 솔직히 저도 제 시를 다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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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묵: 시집은 4부 53편, 그리고 마지막에 <트레일러 필름>으로 「평화를 삽니다」가 실렸는데요. 앞부분에 대한 말씀은 들었으니, <트레일러 필름>은 말 그대로 다음 시집에 대한 어떤 예고편입니까?
리호: 이 시집이 나온 비하인드가 있어요. 원래는 동시에 시집 두 권을 낼 예정이었어요. 이 번 시집은 발표된 시들 중 추려서 묶은 거고요. 미발표 시가 없어요. 트레일러 필름이 아마 꼬리잡기처럼 묶은 다음 시부터 일 겁니다. 설탕 컷이라 부를게요. 설탕 컷 후 50여 편을 더 썼고, 세 번째 시집으로 묶을 예정이었는데 게을러서 퇴고를 다 못했어요. 1년이 걸릴지 장담하지 못해서 그냥 ‘짬짜면’ 말고 ‘양장피’로 가자 결론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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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묵: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주세요.
리호: 전 12년째 하루를 일생인 양 삽니다. 등단하는 데 12년 걸렸는데 등단 후 12년이 지나도 달라진 건 없는 듯합니다. 시간을 어떻게 쪼개야 하는지, 연구하다 보면 하루가 막 가버리고 1년이 막 가버리고, 봄에 눈이 오고 가을에 진달래가 피기도 합니다. 주위에선 24시간짜리를 48시간으로 쪼개 쓴다고 미쳤다고들 합니다. 매일 미친 건 사실 미친 게 아닌 듯도 하고요. 봄도 미치고, 진달래도 미치는데 저라고 미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간혹 지나가던 선자가 왜 사냐고 묻는다면 “커피 때문에”라고 답하고, 커피는 왜 라고 묻는다면 “설탕이니까”로 대답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재랄 같은 봄입니다. 그냥 말없이 달달하게 웃어만 주세요. 가끔 설탕이 싱거운 말을 업어주기도 하거든요. 감사합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나는 12월 내 생일은 4월
리호
건드리지 마세요 커집니다
파도는 아니고요 파라솔입니다 건드리면 날아가거나 꼬마자동차를 부릅니다 갈아타는 역은 화살표를 다 도둑맞고 쫄쫄 구부러진 강의시간은 빨간 휴강 버튼
119를 불렀고 경찰이 왔을 때 커다란 우산은 파라솔인지 파도인지 자꾸 커집니다
만지지 마세요 가시에 찔립니다
장미는 12월 딸기는 12월 기말고사는 12월 나는 12월
생일 지난 프리지어는 13월 하우스 수박은 13월 인터넷 강의 F는 13월 딸은 13월
만지지 마세요 눈물이 마르고 있어요 가시에 찔립니다 줄로 묶어요
신발 무늬는 장미, 간지 나자나 간지_는 어떤 언어에 속하나 비속어인지 속어인지 은어인지 아 물고기는 싫다고 했지 나는 12월
은행은 5월 포장마차는 5월 구멍 난 속옷은 5월 내 생일은 4월 선물은 팬티든 신발이든 무조건 콜 찔리기 전에 도착해야 할 걸? 프리지어 향 껌 하나 주세요
혼자 있지 마세요 빚을 지게 됩니다
아프지 마세요 오랜만에 후시딘이 떨어졌어요 주저하지 마세요 오랜만에 핸드폰이 깨졌어요 콧수염을 밀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눈썹을 밀지 마세요 오랜만에 파라솔에 모여 와인을 마시면 바삭한 가시 안주를 서비스로 드릴게요 오랜만에 나는 12월 내 생일은 4월
겁이 나 반복하여 힌트를 줘도 달력을 자꾸 쓰다듬는 나는,
―『설탕이니까』, 시인의 일요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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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
리호
이 돌다리는 추워
다리를 지나려면 은백색 정장을 입어야 하지 바람은 빠를수록 사진이 잘 나오지 바람과 관계된 자들을 모두 묶어 잔반 처리반으로 보내는 동안 못난이 진주 목걸이를 한 그녀가 울고 있지 개나리처럼 등단한 시인의 반은 진흙을 파고 있다고 전해지지 팔수록 숭어 잔해만 등장하지 웃자란 손가락을 자르고 싶을 때가 있지 멋있는 출세어로 남을까 해 자란만큼 잘라내며
시간 돌리는 일이 가장 쉬웠어 한겨울에 잔디가 깔린 언덕을 오르면서 자전거 바구니에서 졸다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내리지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중에 자꾸 배가 고파 잠꼬대로 김치를 부를까 눈을 다시 감지 같은 방향으로 잠을 자는 개와 겨울고양이와 나, 이 다리는 추워 걷다 보면 주차장 주차장을 지나 수영장 수영장 지나 빗물펌프장 숭어가 뛰네
정장을 벗어 둘 2월의 복음서에 숭어가 꽂혀있었나 다리에서 떨어진 바람이 슬쩍 비늘 서너 장을 넘길지도 몰라 책갈피도 없는데 읽은 표시는 무엇으로 하나 기억은 숭어 밥이 되었지
자장가가 필요한 날이 자꾸 늘고 같이 놀던 숭어는 의심 많은 여름고양이한테 갔지
물방울이 못난이풍선이 되고 은백색 기구가 된 날이었지
―『설탕이니까』, 시인의 일요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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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이니까
리호
선풍기 소리가 짤 때 필요한 녹는 점
쓴맛을 평가할 때 필요한 알갱이의 개수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살아야겠다는 미세먼지 담당
끝말잇기나 꼬리잡기의 달인
비 온다
삼척에 갔지
구척장신 파도가 물고기 눈처럼 내렸지
잘난척하느라 온몸에 분수 구멍을 냈지
증명하지 못한 문제들을 뿜었지
여름출판사는 문을 닫고 더는 포도가 열리지 않았지
몸속에서 사라진 세포들의 DNA에 토성의 혈액형을 붙여줬지
바람 분다
기차 뒤에 바짝 꼬리가 두 개 달린 바다
쓴맛 소리
공화국에 대한 맞춤형 설탕 알갱이
―『설탕이니까』, 시인의 일요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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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 기자 2014년 《실천문학》 제3회 오장환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리호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설탕이니까』를 발간했다. 10여 년 전, 시단의 이단아처럼 등장한 리호의 시세계는 마법적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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