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31 _ 유재영의 「나목 평전」
나목 평전
―미술관이 있는 풍경, 박수근
유재영
물들인 군복처럼 구부정한 허리로
미술관 한쪽 벽면 지그시 바라보는
남겨둔 그의 배후가 흑백으로 걸려있다
화강암 질감 속에 두런대는 실루엣
중절모 쓴 네댓 사람 쪼그려 앉은 채로
자식들 월사금이며 장리빚 걱정까지…
감자떡, 수수부꾸미, 찐 옥수수, 물고구마
무명수건 머리 두른 이 고장 아낙네들
해종일 못다 판 하루 함지박에 누워있다
식솔처럼 날아오는 박새며 오목눈이
화가는 죽고 나서 나목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개울 물소리 따라가는 연필선,
― 『달항아리 어머니』, 동학사, 20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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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는 저서 『노인과 소년』에서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박수근 화백의 작품 세계와 그가 겪은 시대적 고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박완서 작가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만날 수 있다. 박완서 작가는 박수근 화백을 나목裸木처럼 시대의 추위를 맨몸으로 견뎌낸 화가라고 기억한다. 박수근 화백은 가난해서 그림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데, 당시 국내 화단에서는 그를 아웃사이더 취급하며 소외시켰다. 그는 오히려 해외에 이름이 알려지면서 화가로서의 입지가 더 굳어진 화백이다. 그는 화강암에 그림을 새긴 것 같은 질감을 화폭에 담아냈다. 돌이야말로 가장 흔하고 서민적이며, 보편적인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화강암은 고단하고 시련이 많은 서민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대상인데, 그런 대상의 질감을 살린다는 것은 서민들의 눈물 어린 삶을 작품으로 녹여 내고자 했던 박수근 화백의 의지가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부정한 허리” 자체는 평생 노동에 시달린 결과를 대변한다. “중절모 쓴 네댓 사람 쪼그려 앉은” 모습에도 세상 근심 걱정 다 끌어안은 느낌이 있다. “감자떡, 수수부꾸미, 찐 옥수수, 물고구마”와 “무명수건” 등은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보여주는 소재들이다. “화가는 죽고 나서 나목으로 돌아왔다”는 행간의 의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나목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벌거벗겨진 채 맨몸으로 자신의 모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나목이다. 나목은 고목枯木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고목은 오래된 나무지만, 나목은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형상을 띤다.
나무는 보통 겨울에 나목이 된다. 고목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지만 나목은 봄이 오면 잎이 자라고 꽃이 필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는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앞날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그런 점에서 나목은 질긴 생명력으로 새봄을 준비하는 민초들의 삶을 대변한다. 지금은 이 나목에 잎도 꽃도 없지만 “박새며 오목눈이” 새가 있다. 조금만 기다리면 싹도 돋고 꽃도 필 것이란 확신으로 그들은 나목 위에 머무른다. “해종일 못다 판 하루 함지박에 누워있”는 풍경을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까닭은 봄이 와서 꽃이 필 것이라는 희망이 위안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죽고 나서 나목으로 돌아” 온 화가는 “오늘도 개울 물소리 따라가는 연필선”으로 메마르고 지친 삶을 그리며 누군가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을 것이다. (이송희)
이송희
2003《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이름의 고고학』,『이태리 면사무소』,『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대명사들』,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눈물로 읽는 사서함』,『길 위의 문장』,『경계의 시학』,『거울과 응시』,『현대시와 인지시학』,『유목의 서사』 등이 있다. 고산문학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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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평전―미술관이 있는 풍경, 박수근 유재영 물들인 군복처럼 구부정한 허리로 미술관 한쪽 벽면 지그시 바라보는 남겨둔 그의 배후가 흑백으로 걸려있다 화강암 질감 속에 두런대는 실루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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