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의 유전
이미영
아이들이 기생수*라고 놀렸다
기초생활수급자를 줄인 말이라는 댓글도 달아주었다
그 이후로 왼손이 말을 걸어온다
깊이 생각하지 마
선생님은 비밀이 없고 친절하다
꼭 그렇게 다 말해야 합니까
오른손을 들고 항의하고 싶은데 왼손의 충고가 멈추지 않는다
얼굴을 씻고 문자를 찍는데도 손의 용도는 정해져 있고
아무도 오른손이 보낸 말들을 받지 않는다
도대체 행방불명된 말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바지 주머니에서 왼손이 튀어나와 박장대소를 한다
해질녘, 교실 구석에서 뺨을 맞은 왼쪽이 서 있다
일기를 쓰다가 잠이 들면 그날의 기분을 왼손이 고쳐 쓴다
아버지, 왼손이 이상해요
나를 닮아서 그렇단다, 얘야
아버지는 프레스에 잘린 왼손을 내밀었다
의수를 뺀 아버지의 손목이 뭉툭하고
기생수다!
얼떨결에 튀어나온 말에 놀라, 그날 밤 나는 환지통을 앓았다
잘린 플라나리아는 없어진 몸통이 다시 자라난대요
아버지와 나는 밤마다 왼손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인다
*기생수(奇生獸): 일본 애니메이션
― 『2020년 경기문학』, 청색종이, 2020.
이미영 시인 _ 왼손의 유전 < 포토포엠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정지윤 시인 _ 구름은 모르핀을 닮았다 (0) | 2023.03.19 |
---|---|
김분홍 시인 _ 스프링클러 (0) | 2023.03.19 |
이정은 시인 _ 다섯 개의 물의 장면 (0) | 2023.03.17 |
김휼 시인 _ 단단한, 위기(圍碁) (1) | 2023.03.14 |
리호 시인 _ 기타와 바게트 (0) | 2023.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