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메이커
정상미
맨 앞을 끌고 가는 바람막이 촛불 하나
어느 순간 꺼져야 할 비운의 단막에도
기꺼이 역을 맡는다 높바람 미당긴다
지친 몸 다 털어내 더는 촛불 아닐 때
웅그린 바깥을 밀어 저 멀리 앞세우는
한 번도 중심이 되어 살아본 적 없는 사내
한 얼굴이 바람을 연다 다른 얼굴 만나서
외로운 길 마다 않고 앞을 밝히고 나간다
심지가 다할 때까지 나를 당긴 아버지처럼
정상미, 『안개의 공식』, 책만드는집,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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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반복되는 틀에 박힌 삶을 탈피하는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맞는 취미를 갖는 것이다. 스포츠는 이제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현대인들의 여가활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운동은 건강한 몸을 지키기 위한 목적을 넘어 자기 충전과 자기 계발을 위한 놀이의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일순간 몰입하여 땀 한 방울의 쾌감을 느껴본 사람들은 안다. 승패에 대한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페어플레이 정신이 있기에 후회는 없다. 존중과 인정, 협력과 배려, 열정의 아이콘인 스포츠의 가치를 이해하다 보면 경기를 보는 재미가 한층 더 고조된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육상이나 수영 등 장거리에서 우승 후보의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투입되는 선수, ‘페이스메이커’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완주가 아니다.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을 위하여 일정 거리까지만 최선을 다해서 달리는 일종의 엑스트라 역할을 하는 존재다. 참가자들의 페이스 조절과 완주를 위하여 전략적으로 상황에 맞게 투입되는 사람이다. 정상미 시인의 시 「페이스메이커」에서 우리는 “아버지”라는 조력자를 만난다. 인생에서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 없이 사랑을 베푸는 존재로서의 아버지. 시적 주체는 아버지를 “한 번도 중심이 되어 살아본 적 없는 사내”라고 말한다. “외로운 길 마다 않고 앞을 밝히고 나”가는 가장의 무게를 우리는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맨 앞을 끌고 가는 바람막이 촛불”은 언제나 위태롭다. 그러나 “어느 순간 꺼져야 할 비운의 단막에도” 아버지는 기꺼이 “나를 당”기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준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에서 페이스를 조절해 주는 ‘페이스메이커’가 있을 것이다. 불현듯 <페이스메이커>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대사가 떠오른다. “나는 페이스메이커다. 마라톤은 42.195km, 하지만 나의 결승점은 언제나 30km까지다. 메달도, 영광도 바랄 수 없는 국가대표… 오직 누군가의 승리를 위해 30km까지만 선두로 달려주는 것! 그것이 내 목표이자 임무다. 그래도 언젠가 한번은… 오로지 나를 위해 달리고 싶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좋은 자극제가 오늘의 나를 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의 인생을 끝까지 완주해 줄 수는 없다. 우리의 부모 또한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타자를 위한 1등이 아닌, 자신을 위한 미래를 설계해 가는 긴 레이스의 첫발을 내디뎌야 할 때다. (김보람 시인)
김보람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모든 날의 이튿날』, 『괜히 그린 얼굴』,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 연구서 『현대시조와 리듬』이 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유망작가에 선정되었다. 21세기시조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17 _ 정상미의 「페이스메이커」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17 _ 정상미의 「페이스메이커」 -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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