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심사를 맡았던 김남조, 김광규, 정호승 시인은 “한국의 서정시가 본궤도에 오른 느낌”을 받았다며 길상호 시인의 시에 대해 상찬을 한 적 있다. 심사평의 상찬은 상찬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길상호는 길상호만의 ‘서정성’을 구축해 나갔다. 등단 이후 그는 모국어를 자유자재로 부리며 서사와 서정을 제대로 아우를 줄 아는, 시어의 마술사라는 호칭을 얻는다.
10남매의 마지막에 쌍둥이로 태어나, 아버지 없이 자라야 했던 지독한 가난과 고독의 가족사는 그를 일찌감치 시인으로 키워냈다. 시를 쓰면서 자아를 막무가내로 괴롭혔던 어린 소년은, 타인의 존재와 삶을 이해하기 위해 시를 쓰면서 시인이 되었고, 어느새 역량 있는 중견 시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작년 초순 면역체계가 흐트러지면서 길상호 시인은 반년 가까이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시달렸다. 머리가 자주 아팠고, 몸과 마음의 수평선이 기울어져, 건망증과 불면증으로 시달렸다. 말이 어눌해졌고, 어눌해진 만큼 정반대로 온갖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머릿속은 부글거렸다. 매일 약을 먹어야 했고, 하루에 세 번 혈당수치를 재야 했다.
그런 심한 병증 가운데에서 길상호 시인은 자신의 아픈 몸을 시로 일으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여섯 번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는 삶이 고달픈 어느 시인이 써 내려간 병적 징후의 기록만이 아니라, 삶을 버텨내려는 한 시인의 고투인 동시에 자기 존재에 대한 치열한 증언 의식이다.
상처와 고통의 흔적 속에서 더욱 섬세해진 감성과 깊은 응시는, 우리 시의 또 다른 보석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날개를 갖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에 시달리는, ‘감염된 심장’(「모처럼의 통화는」)을 가진 자의 울림이 있는 노래. 길상호 시인의 시적 응전 방식에 박수를 보낸다.
---------
<시집 속 시 맛보기>
옥천버스
길상호
안남은 허기와 함께 들른 면 소재지
손두부만 떠올려도 따뜻했는데
식당은 정기휴일 팻말을 걸고 있었네
몽글몽글 엉긴 시간 속을 뛰어다니는 건
어린 고양이들뿐, 뒤따라가면
꽃잎의 쪽방을 닫고 숨어 버리는 통에
술래잡기도 금방 끝이 나고 말았네
식당 앞에는 아무도 없는 공판장
공판장 옆에는 임대를 기다리는 우체국
우체국 옆 이발소 회전간판만 느리게 돌아가는데
백발의 이발사 가위질을 하는 동안
남은 햇빛이 조금 더 짧아졌네
언젠가 이곳에 빵집 하나 차려
담백하게 부푼 시간을 진열해 놓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려도 좋겠다는 생각,
기다리며 세상을 잊어도 좋겠다는 생각,
언제 자리를 잡은 것인지
분홍 스웨터의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아껴 가며 조금 남은 볕을 쬐네
흙먼지를 끌고 온 버스는
서지도 않고 정류장을 지나가네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
방파제
길상호
여러 감정이 몰려왔다
비구름을 바닥에 엎지르고 말았다
날개 있는 것들은 날지 않았다
대신 해안선이 비행을 시작했다
파도로 바위 깨기
아침은 쿨쿨 잠에 빠져 일어나지 않았다
너는 찢어진 바다를 꿰매고 앉아 있었다
찌그러진 바다만 출렁거렸다
모래로 만들어진 사람이 사라졌다
해당화만 남아
해원굿을 하며 돌아다녔다
여기는 해안이라 떠밀려 온 언어가 많았다
모두 축축한 혀를 빼물고 있었다
안간힘으로 막아 보지만
당신의 발자국은 어쩔 수 없었다
오고 또 오는 파도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
여름휴가
길상호
한적한 곳을 찾아
연잎이 마련해 준 물방울 방에 묵었어요
마음 가는 대로 마음을 굴리다가
쌓여 있는 물결을 뒤적이기도 했어요
매번 바람에 흩어지는 이야기
줄거리가 이어지지 않을 땐 밖으로 나와
푸른 잎 테두리를 느긋이 걸었어요
잎맥을 세다 보면 연잎 한 장도 너무 넓어서
건너편 잎까지 둘러보진 못했어요
연꽃이 하나둘 문을 닫는 저녁에는
깨진 빗방울 모아 탑을 쌓고
별이 된 고양이 산문이를 떠올렸어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슬픔도 향기롭게 우러나는 방
물방울이 다 마를 때까지
올해의 여름휴가는 참 투명했어요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더욱 섬세해진 감성과 깊은 응시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더욱 섬세해진 감성과 깊은 응시 - 미디어 시in
하린 기자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심사를 맡았던 김남조, 김광규, 정호승 시인은 “한국의 서정시가 본궤도에 오른 느낌”을 받았다며 길상호 시인의 시에 대해 상찬을 한 적 있다. 심사
www.msiin.co.kr
수몰지구에서 피워낸 섬세한 시의 문양 (0) | 2024.09.21 |
---|---|
섬 속의 꽃, 꽃 속의 섬을 미학적으로 펼지는 시인 (0) | 2024.08.08 |
현의 울림을 닮은 ‘무’의 아름다움과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갈망 (1) | 2024.07.26 |
감각적 언술과 실험적 화법, 서정적 미메시스의 조화 (0) | 2024.07.26 |
감각과 경험을 통해 빚어낸 몸의 언어, 빛나는 경험 미학 (0) | 2024.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