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17년 『문학3』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다연 시인이 첫 시집 『나의 숲은 계속된다』를 타이피스트 시인선으로 출간했다. ‘빈칸’과 ‘공백’과 ‘바람의 언어’를 손에 쥐고 오랜 시간 묵묵히 자신의 목소리를 탐색해 온 시인은 일상의 소음에 지친 우리에게 에코의 목소리를 건넨다.
어떤 말로도 채워지지 않는 존재의 상실을 통해 시인은 그 나날을 기록함으로써 ‘없음’에서 발현되는 말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에 이르고, 그것을 덤덤하게 솔직담백한 어조로 풀어낸다. 부산스러움도 없이, 김다연 특유의 배려와 세심함이 돋보이는 문장들이 탄생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김다연이 초대한 나직한 언어의 세계를 숲을 산책하듯 걸어가며 아름답게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나의 숲은 계속된다』에서 포착된 특징은 그녀가 ‘무’의 언어와 그리움의 언어를 배면에 깔고 형상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김다연에게 이 세계는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이며, 변화와 깊은 사이의 스며듦이며, 적요와 소란 사이에서 발생하는 말들이지만, 그것은 끊어질 듯 이어진 현의 울림을 닮은 ‘무’의 아름다움인 동시에 젊은 시인이 가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갈망이다.
김다연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나의 숲은 계속된다』는 존재의 상실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상실에 머무르지 않고 상실을 뛰어넘는다. 그것도 섬세하게 ‘스밈’의 방식으로 마음에 틈새를 향해 확장해 나간다. 젊은 시인이 보여주는 미학적 감성과 섬세함에 독자들은 마침내 박수를 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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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슬픔의 최종본
김다연
나는 무뎌지고 무뎌진 슬픔의 수정본으로 어떤 이미지도 어떤 이야기도 없는 눈물을 지닌다 모든 빛들이 나를 통과한 뒤에도 달라지지 않은 낯빛을 받아들인다 어딘가에 나와 언젠가의 나는 관계가 없다 연속되지 않은 요소로 드문드문 드리워지는 그림자와 같이 내가 아닌 어떤 것을 지칭하는 나는 눈을 감고 있는 어둠의 지향으로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경우의 수로 불려도 꽃이 되지 않는 어떤 이름을 지닌다
내가 떠난다면 나는 남을 것이다 내가 남는다면 나는 떠날 것이다 나다움이 없는 완전한 외부로 향한다 이젠 아무렇지 않은 일이다 거기서 거기인 상태를 거듭하는 슬픔은 이건 슬픔이 아니라고 말한다 더 이상 시간에 속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를 지금으로 덮어쓴다 자정이거나 정오였을 풍경은 구성되지 않는다
저 끝까지 가도 거기가 끝은 아닐 텐데 더는 갈 곳이 없어 저 끝에서 끝나게 될 나의 최종은 수정하다 날아간 슬픔으로 저장된다 모호하고, 무모하며, 덧없는 한낮의 형상으로, 파일명만 바뀐 최최종의 밤으로
―『나의 숲은 계속된다』, 타이피스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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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의 밤을 중얼거리고
나는 나의 꿈을 웅얼거리고
김다연
무언가 쓰고 싶었는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밤일 뿐인데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인데
몸에서 새가 울고 강이 흐른다
나는 조금 더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아
나무 곁으로 옮겨 가야 할 것 같아
어제 보이던 것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데
너는 너의 밤을 중얼거리며
나는 나의 밤을 중얼거리며
손을 잡았을 뿐인데
우리는 우리처럼 보였지
너는 거의 나무에 닿은 거 같아
곧 잎이 피어 오를 거 같아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아직도 시를 쓰니?
나는 여기에 홀로 남아 여기의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어
무언가를 쓰고 싶었는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텃밭을 가꾸고 방울토마토를 기다리면서
―『나의 숲은 계속된다』, 타이피스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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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단락에서
김다연
1
기쁨이 없어서 슬픔이 없다 고유하지 않은 고요의 밤 입은 있으나 할 말이 없다 끝내 끝내지 못한 채 끝이 나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위해 물거품이 된...... 너를 사랑해서 나를 잃어 간다 움직일 수 없는 너의 손발이 되느라 지쳐 간다 잊을 수 없는 계보를 잇고 있다 아무 소용없는 것이 나에게는 소용 있다
되돌아갈 수 없는 날들로 되돌아가는 나는 나는으로 이루어진 너다 씀으로써 나는 나에게서 멀다 나는 어떤 어둠으로부터 들려온다 나는 나를 알아볼 수 없다 불투명하다
2
이름만 바뀐 나무들과 옆으로 간다 팥배나무 앵두나무 연필향나무 나열을 위한 나열 속에서 흰 눈동자를 이을 단어가 없다 예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니다
비와 주저앉고 주저앉은 곳에 머물러 있다 말해도 소용없는 말의 앞뒤를 바꾼다 달라 보이지만 같다
생각에 음악을 얹지 말자 고조되지 않은 미증유의 하루 위를 허튼 걸음으로 오간다 그 모습이 그립지만 그 모습은 없다
가만히 있어도 잃고 있다 붙잡아도 떠나고 있다 남겨질 이유 없이 남겨져 있다
철새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너라는 단어와 끝에서 끝으로 간다
가물거리는 강 위를 떠내려간다
그 밤을 지나 조용에 당도하고 있다
이제 와 비로소
단락이 바뀌고 있다
―『나의 숲은 계속된다』, 타이피스트, 2024.
현의 울림을 닮은 ‘무’의 아름다움과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갈망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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