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03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장인수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슬픔이 나를 꺼내 입는다』를 문학세계사에서 발간했다. 그동안 시인은 시집 『유리창』, 『온순한 뿔』, 『교실, 소리 질러!』, 『적멸에 앉다』, 『천방지축 똥꼬발랄』과 산문집 『창의적 질문법』, 『거름 중에 제일 좋은 거름은 발걸음이야』, 『시가 나에게 툭툭 말을 건넨다』 등을 발간했는데, 자연과 인간에 대한 본질을 솔직담백하게 읽어낸 후 경쾌한 어조로 빼어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이번에 발간한 『슬픔이 나를 꺼내 입는다』는 일상의 슬픔 속에 용해(溶解)되어 있는 삶의 명랑성과 익살을 잘 포착한 시집이다. 일상의 명랑한 가치를 미학적으로 끌어올린 시집인데, “일상에는 슬픔의 총량과 기쁨의 총량이 비슷하게 녹아있어요.”라는 시인의 가치관이 잘 녹아있었다.
제일 먼저 시인의 영성(靈性)이 반영된 작품들이 눈에 뜨인다. ‘세례, 겉사람, 속사람, 보살, 행전, 아미타불, 공양’ 등 종교 용어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데, 영적인 언어를 내밀하게 증폭시킨 과정이 돋보인다.
또한 이번 시집에는 가족에 대한 시가 많다. 이전의 시집 『적멸에 앉다』에는 아버지에 대한 시가 많았는데, 이번 시집에는 아내에 대한 시가 많다. 흔히 종교와 가족 얘기를 하면 좋은 시가 나오기 어렵다는 시의 ‘불문율’을 장인수 시인은 뛰어넘는다. 작품을 읽다 보면 “시가 곧 좋교이고, 시가 곧 가족이 아닐까요?” 이렇게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들린다.
해설을 맡은 오민석 문학평론가는 장인수 시인의 시가 “생명성의 불꽃으로 가는 도화선”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는 장인수 시인이 슬픔 속에서도 삶의 찬란한 순간을 발견하고, 이를 시로 표현하는 능력을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장인수 시인은 ‘몸철학’에 근거하여 몸의 언어를 구현하는 시를 쓰고 있다. 몸은 감각과 경험의 총체다. 관념과 영성의 세계조차 감각과 경험의 통로를 통해서 구현된다. 그는 머릿속의 관념을 감각의 촉수로 끌어내리고, 감각 기관에 포착된 느낌을 관념의 창고에 저장한다. 그에게 관념은 감각의 힘으로 분명해지고, 감각은 관념의 형태로 신뢰의 대상이 된다. 감각과 경험으로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보여진다.
오민석 평론가도 다음과 같이 ‘몸철학’을 분석했다. “장인수의 관념은 늘 몸의 언어로 구현된다. 그는 몸에 오는 자극을 통해 관념을 얻고, 관념을 다시 몸으로 보내 실체화한다. 그는 자기 몸을 건드리는 자극을 중시한다. 그의 사유는 음식을 먹을 때, 아름다운 것을 볼 때, 근육을 움직여 힘든 노동을 할 때, 최대로 활성화된다. 관념은 그 자체로 그에게 잘 다가오지 않는다. 그는 감각의 경험을 통하여 관념을 확인한다. 그는 몸의 경험에서 정직과 진실, 실체와 기쁨, 그리고 유머를 발견한다. 감각계는 그에게 즐겁고 빛나는 해방구이다.”
장인수의 시들은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밝다. 명랑하다. 성(性)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직방으로 솔직하게 다룬다. 시적 기교를 배제하고 날것의 감각과 체험을 분출한다.
오랜만에 명랑함이 가득 찬 시집을 만났다. 시적 기교를 부리지 않은 상태에서 명랑함이 슬쩍 깊이 있는 ‘몸철학’에 닿고 있는 장인수의 시는 독자들에게 남다른 시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해 줄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아내를 바꿔 입었다
장인수
샤워 후
후다닥 회색 반팔티를 입고 외출을 하는데
헐렁헐렁 보들보들 촉감이 좋구나
엥? 아뿔사! 아내 티를 입고 나왔네!
후다닥 집에 가서 벗을까?
아니야 그냥 입자
나이 오십 중반이 되니
겉궁합이 맞는지
아내 옷을 바꿔입어도
몸이 편한 나이가 되었구나
아내 옷이라는 속사람을 빌려 입었으니
옷 반려자가 되었구나
남편이라는 겉치레가 은근히
기분이 맑고 째진다
부부는 마음보다 몸을 자주 섞는 사이
몸을 서로 살피며 마음을 맞추는 사이
오늘은 아내를 바꿔 입고
젖 달린 듯 팔을 휘휘 흔들며
활보하는 하루가 되리라
―『슬픔이 나를 꺼내 입는다』, 문학세계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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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날 커피
장인수
아기 다루듯 조심조심 다루어도
꼬투리가 벌어지면서 익은 참깨가 우수수 떨어진다
흔들림을 최소화하면서 살살 베느라
낫질을 하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털푸덕 주저앉아 쉰다
꼭두서니 빛 노을이 시뻘겋게 타오른다
한 생애를 사르듯,
우리의 생애를 언젠가 가져갈 별들이 뜨겠지
밭고랑에서 믹스커피를 탄다
콧등의 땀방울이 후두둑 커피에 섞인다
낫날로 커피를 휘젓는다
깻대 하단부를 싹둑 베던 쇠맛이
혀끝에 배어든다
핏빛 영혼 흘러나와
커피를 물들인다
―『슬픔이 나를 꺼내 입는다』, 문학세계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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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장인수
가을 산에 든다
골짜기는 끝없이 깊구나
나는 깊이가 부족한 사람
내 글도, 그림도, 인생도, 섹스도
깊이가 부족한 사람
평범하게 좋을 뿐이지
깊이가 약해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하는가?
가을 산에 든다
꽃골 낙엽골 가도 가도 깊구나
떨어지는 낙엽들이 서로 키스하고, 춤추고, 뒹굴고, 타닥타닥 딴따 탱고, 밀롱가, 말발굽 소리, 산울림이 되어 쌓이는 소리
노래가 울려 퍼지는 저 깊은 골짜기
얼마나 깊어야만 하는가
깊지 않으면 예술이 아닌가?
―『슬픔이 나를 꺼내 입는다』, 문학세계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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