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은 서영처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북해 」 「털실 고양이」 「눈먼 코끼리를 위한 바흐」 등 45편의 시를 수록했다. 서영처 시인은 2003년 《문학/판》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이후 시집 『피아노 악어』 『말뚝에 묶인 피아노』와 산문집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 『노래의 시대』 『예배당 순례]』 『가만히 듣는다』를 발간했다.
시인은 산문집 『노래의 시대』 프롤로그에서 “모든 감각의 근원은 소리”라고 말했다. 특히 노래는 “마음의 가장 깊숙하고 후미진 곳까지 침투해서 존재의 의미를 확인시킨다”고 언술했다. 주지하다시피 존재의 의미는 개인적 층위의 단독자적 자리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가 세계와 맺는 공동체적 관계에 의해 유연하게 작동한다. 그렇기에 “노래는 개인의 기억과 추억을 지배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기억과 추억을 지배하”며 시대적 맥락을 양식화한다. 이를 내면화한 개인에게 노래 및 음악은 사적 인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공동체적 사유를 야기하고 사회와 세계로 주체의 시선을 넓힐 계기를 제공한다. 따라서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에 나오는 음악적 요소들은 다층성과 내밀한 코드로써 작용할 확률이 높다.
시인은 또한 “예술이 주는 환희와 황홀은 인간의 감성과 의식을 변화시키고 보다 확장된 무한한 세계로 인도한다”고 했다. 이는 서영처 시인이 시적 감각의 확장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나타낸 말로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의 시편들이 고여있는 시로 머물지 않고 움직이는 시로 자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음악적 요소의 다층성과 내밀함을 실제 시를 통해 살펴보겠다. 「피아노의 세계, 세계의 원리」에서는 피아노를 전유해 ‘세계의 원리’를 거칠게 형상화하는데, 피아노 건반의 형상을 ‘0’과 ‘1’의 디지털 코드로 환원하여, “허무와 욕망, 파편화된 언어적 질서 등 존재를 둘러싼 세계의 원리를” 간명하게 풀어낸다.(이병국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추천사를 쓴 송재학 시인도 서영처 시에 나타난 음악적 요소를 간파한 후 “‘문학의 음악’ 혹은 ‘음악의 문학’이라는 시공간을 서영처라고 할 수” 있다고 명명했으며, “이번 시집에서도 음악 요소가 여전히 유효한 시적 통점”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제시했다. 음악적 요소가 매력적으로 자리한 시를 읽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은 의미 있는 읽을거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시집 전체가 다 음악적 요소를 활용한 시로 채워져 있진 않지만 군데군데 자리한 시편들을 통해 서영처만의 시적 포즈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콘트라 베이스
서영처
크고 튼튼한 가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악기는 두고 가방만 빌려 달라고 했다
가죽 가방에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린 사람
촉각 경험이 풍부한 가방 속에서 손길을 기다린다
굴촉성의 선율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넝쿨처럼 허공으로 뻗어갔다
그는 가방에서 늪의 비린내가 난다고 불평한다
피 냄새도 풍긴다고 우긴다
이 가죽이 틀림없는 악어가죽이라고 주장한다
똑, 똑, 똑, 가방 안에 연금된 사람을 불러낸다
눈이 부리부리한 배불뚝이 남자가 나온다
그는 계좌를 아내에게 맡겼다고
가방 속으로 바삐 들어가 버린다
눈물, 연꽃, 배임, 횡령, 사기 같은 단어를 섞으면 한 마리 악어가 나타난다
생각이 복잡한 가방 속에서 불쑥 꼬리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따금 그는 독주를 털어 넣고 저음으로 즉흥곡을 뽑는다
가락은 공중을 떠다니는 차가운 바람
그가 음치라는 소문이 퍼진다
탈출에 성공한 뉴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스스로 은신처가 되기로 한 남자
물론 나는 아직 가방을 돌려받지 못했다
*카를로스 곤 회장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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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실 고양이
서영처
겨울 해는 보푸라기가 많다
털실 꾸러미처럼 천천히 굴러간다
고양이가 양지바른 곳에서 털을 고른다 존다
잠의 동굴 깊숙이 굴러들어 온 해를 쫓아다니며 장난을 친다
쥐를 잡았다 놓았다 놀리는 것처럼
두 알의 개복숭아를 달고 꼬리를 바짝 세우고 걸어온다
꼬리로 물음표를 만든다
고양이 왈츠를 들으며 피아노 위에서 잠든다
햇살은 하늘을 할퀸 자국
앞발을 핥는 입가에 향기로운 수술이 돋는다
털실과 먼지, 정적으로 이루어진 고양이
눈 속 깊은 곳으로 분자구름이 떠다닌다
고양이가 털실 목도리를 두르고 학교에 간다
햇살을 발톱에 걸고 뛰어다닌다
풀어낸 햇살로 그새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 짠다
스웨터를 풀어 바지를 짜고 바지를 풀어 장갑을 짜고 나를 풀어 아이를 짜고
닳고 닳도록 코를 걸어 떠 내려간 내력
아이가 고양이처럼 몸을 말고 매듭과 문양의 이야기를 듣는다
잠이 많은 겨울 해가 눈꺼풀 속 괴발개발 찍어 놓은 발자국
낚아챌까 말까 낚아챌까 말까 고양이는 해를 훌쩍 낚아챈다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 파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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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코끼리를 위한 바흐
서영처
동물보호구역에 62세의 람 두안이 산다
펄이 자주 방문해서 연주를 한다
먼 산맥엔 바람에 헤진 룽다가 펄럭이고
그만큼 헤진 귀를 펄럭이며 두안은 음악을 듣는다
밀려오는 기억을 이기지 못하고
육중한 몸을 긴 코를 흔들며 피아노 곁을 서성거린다
삶이 빈 요새처럼 적막으로 가득 차서 흘러나오는 선율
펄이 평균율을 치는 동안
쇠꼬챙이와 사슬이
서커스의 눈부신 조명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벌목장의 나무가 허리를 덮치고
두안이 제 몸에서 울부짖는 코끼리를 꺼내고 있다
무거운 보따리들을 하나둘 들어내고 있다
영 오지 않을 것 같던 봄날
코끼리의 꿈이 투영된 환영 같은 날
두안은 강물인 듯 바위인 듯 생각이 많은 채로 서 있다
밀림엔 검은 피아노 한 대, 늙은 코끼리 한 마리
숲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저녁 속으로
두안은 신전의 기둥만 한 다리를 천천히 옮긴다
밤에 공원을 산책할 때면
곡예하듯 한 발로 서서 잎사귀를 피워 올리는 나무들
코끼리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 파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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