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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혹은 발효와 묵힘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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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4. 7. 7.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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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밝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새까만 울음을 문지르면 밝은이가 될까미네르바 출판사에서 발간

 

하린 기자

 

김밝은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새까만 울음을 문지르면 밝은이가 될까를 미네르바 출판사의 시리즈 지성의상상시인선으로 발간했다. 2013년 계간 미네르바로 등단한 시인은 동국대학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문인협회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미네르바 부주간, 한국시인 편집위원을 맡고 있으며, 3회 시예술아카데미상, 11회 심호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밝은 시인은 그동안 발간한 첫 시집 술의 미학과 두 번째 시집 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에서 주로 그리움의 원형을 찾는 시편들을 선보였다. 그리움이 가진 근원성과 본질성을 미학적으로 탐구하는 일에 천착하였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섬이라는 공간을 정서적 공간으로 치환하여 불모성, 존재성, 신화성 등을 펼쳐 보인다.

 

해설을 쓴 황치복 평론가는 부재의 고통으로부터 시작된 시적 여정은 꿈과 환상이라는 주술적 세계를 거쳐 발효되고 숙성되는 섬의 세계에 도달하고 있다며, 이러한 과정은 시적 사유의 성숙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시인의 시의식이 그윽해지고 아득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추천사를 쓴 문효치 시인 또한 김밝은 시인의 농익은 서정성에 주목했다. 김밝은 시인이 감정을 절제하고 발효시키는 능력이 탁월하여 그로 인해 시의 격조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고 평했다.

 

김밝은 시인의 고향은 해남이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 유난히 섬에 대한 작품이 많은데, 시인에게 섬은 세상의 간절함을 모두 모아도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이 있다는 것을 터득”(분홍이 익어가는 동안)한 곳이고, “웃음이 쏟아졌던 자리”(오동꽃을 꼬집다)가 있던 곳이며. 무엇보다 이름만 떠올려도 바다 냄새가 와락 달려”(애월을 그리다 12)드는 곳이다. 시인은 그러한 자신만의 섬에서 아물지 못한 상처를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어루만지는 상상의 세계를 펼치고 있으며, “시적 사유가 깊어지면서 발효되고 숙성되는 섬의 세계를 보여 준다.

 

섬을 피폐한 공간으로만 보지 않고 기다림을 묵힐수록 향기로운 우리가 될”(애월을 그리다 13) 가능성이 내재 된 공간으로 보는 긍정적인 시각 또한 김밝은 시인이 가진 시 세계의 특징이다. 시집 새까만 울음을 문지르면 밝은이가 될까를 읽게 되면 섬에 대한 다양한 서정을 진하게 맛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 눈물겹기도 하지

선유도에서

 

김밝은

 

밀어내도 밀어내도 마음만은

무작정 아득해져서

 

홀로 선 바위도 섬 하나가 되고

떨어진 꽃 한 송이도

한 그루 나무의 마음이 되지

 

비를 붙들고 걷는 사람을 꼭 껴안은 바다는

열어젖힌 슬픔을 알아챘는지

흠뻑 젖은 그림자로 누워 있네

 

아무리 생각해도

 

섬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 눈물겹기도 하지

—『새까만 울음을 문지르면 밝은이가 될까, 미네르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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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이 익어가는 동안

 

김밝은

 

봄이면, 할머니는 진달래꽃을 따다 술을 부어 꽃밭 귀퉁이에 묻어놓고 봄날의 향기로 무르익을 때까지 들여다보곤 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마당까지 올라오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잘 익은 분홍을 술잔에 담아 상을 차려놓고 나쁜 놈 나쁜 놈 질펀한 목소리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런 날은 유난히 반짝이는 밤하늘이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아서 나쁜 놈이 되어버린 아버지 얼굴이 더 궁금했다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건드려주곤 해서 혼자 있을 때면 하늘에 가닿는 비밀을 키우며 두근거리던 날들이 있었다 한 번쯤 꼭 만져보고 싶던 얼굴

 

세상의 간절함을 모두 모아도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이 있다는 것을 터득해버린 후 쑥쑥 자라던 상상력은 산산조각이 났고 나도 가끔 고개를 숙인 채 나쁜 사람 나쁜 사람 곱씹어보는 날들이 늘어갔다

 

새까만 울음을 박박 문지르면 맑은 눈물이 될까, 생각하는 사이 모른 척 고개를 돌리던 슬픔이 잠깐 윤슬처럼 반짝일 때도 있었다

—『새까만 울음을 문지르면 밝은이가 될까, 미네르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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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무와 아이들*

이중섭

 

김밝은

 

근심만 올라앉은 어깨를 정오의 그림자가 툭툭 치며 간다 새들의 잔소리가 많아졌다 조금 더 견뎌야 한다

 

사는 일은 여전히 절벽 앞이다 대문 여닫는 소리가 날 때마다 가슴을 부여잡고 멀리 있는 얼굴들을 허공에 그리면 귤꽃 향기가 났다

 

보드라운 숨결이 얹어진 그리움을 그리다 더 가난해진 손을 뻗으면 비웃기라도 하듯 세찬 비를 퍼붓고 손바닥만 한, 은지를 펴다가 퉁퉁 부은 마음으로 바라보면 바다는 여전히 깊고 아득해서 또 서러웠다

 

절대적이고 적대적인 세상의 벽 앞에서도 꿈꾸듯 귤나무에 꽃이 피고 손끝에서 아이들은 알몸으로 재잘재잘 오르내린다

 

만질 수 없는 얼굴을 어루만지고 싶어 억장이 무너질 때 건너지 못하는 바다를 향해 꽃향기 날아오른다 뛰어내린다

 

그토록 다정했던 한 평 반**의 시간을 꿈꾸며, 더 그리워하며

 

*이중섭의 그림 제목

**이중섭이 1년여 간 가족과 함께 살았던 제주의 방 크기

—『새까만 울음을 문지르면 밝은이가 될까, 미네르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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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혹은 발효와 묵힘의 시간 - 미디어 시in

하린 기자 김밝은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새까만 울음을 문지르면 밝은이가 될까』를 미네르바 출판사의 시리즈 ‘지성의상상시인선’으로 발간했다. 2013년 계간 《미네르바》로 등단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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