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22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활동을 시작한 조성래 시인의 첫 시집 『천국어 사전』이 타이피스트 시인선 003번으로 출간되었다. 데뷔 당시 이문재, 이수명 시인으로부터 “자기 언어를 다루는 솜씨에도 기교를 넘치지 않게 조절하는 힘이 있다”는 평을 받은 바 있는 조성래 시인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삶과 상처들을 핍진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결핍과 죽음으로 점철된 자전적 이야기를 곡진하게 펼침으로써 서정시의 새로운 계보를 이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을 던져 준다.
등단 당시 인터뷰에서 시인은 “시를 위해 허구의 내 모습을 만들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 포부처럼 그는 매 시편마다 언어적 기교보다 몸으로 체득한 삶의 근원적인 슬픔에 질문하고 애도하는 목소리를 드러낸다.
따라서 『천국어 사전』은 젊고 가난했던 마음에 용서를 구하는, 도망쳤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 고단한 청춘의 비망록인 동시에, 폭력적인 세계 안에서 절망하고 상처 입은 당신들의 “죄 없음을 증명”하는 기도문인 셈이다.
그런 특징을 잘 알기에 추천사를 쓴 박준 시인은 절망을 “속절없이 곁에 두는 것. 답을 기대하지 않은 채 질문을 던지는 것. 가끔 흐트러지는 절망의 자세를 고쳐 세워 주는 것”을 조성래 시인이 잘 실천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어스름 속에서 한결 깊어지는 그의 눈빛이나 쥐어 보지 못한 시간을 그러모으는 고운 손길”을 헤아리게 된다고 시인이 가진 결을 분석했다.
시인의 첫은 언제나 떨리고 기대되고 불안하다. 조성래 시인도 그럴 것이다. 『천국어 사전』을 통해 펼치는 “아프고 따뜻한 빛”과 “외로움을 앓는 이에게 내미는 힘겨운 안부”(성현아 평론가)를 경험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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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창원
조성래
창원으로 갔다
이제 두 달도 더 못 산다는 어머니
연명 치료 거부 신청서에 서명하러 갔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일단 도착하면
나는 그곳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었다
먼 곳은 먼 곳으로 남겨두기 위하여
나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먼 곳이 너무 싫어서 먼 곳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속속들이 모든 먼 곳을 다 알고 모든 먼 곳을 파악하고
모든 먼 것들의 사정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전지하신 하느님께
합장하고 기도 올리는 성모 마리아……
파티마 병원에 어머니는 누워 계셨다
빗자루에 환자복을 입혀놓은 것처럼 바싹 말라서
아직 살아 계셨다 내 손을 잡고 울다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다 조금 뒤면
자기가 죽을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처럼…… 내가 하나도
밉지 않은 듯이, 어제도 날 본 사람처럼 웃었다
다음 생에는 안 싸우고 안 아픈 곳에서 함께 있자고
이제 당신이 내 자식으로 태어나라고 내가 당하겠다고
당신도 당해보라고
눈물이 끝 모르고 흘렀다 눈물 흘릴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식 된 사람인 것처럼…… 그 시각 모든 일이 먼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선 엄마도 죽고 나도 죽고
끔찍한 날 피해 자리를 비킨 동생도
죽고 모두 죽어서
죽고 나서 웃고 있었다 모두 지난 일이라는 듯
모두 지나야 했던 일이라는 듯…… 그러나 그건
나 혼자서 듣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홀로 죽을 것이며
나는 여전히 어떤 현실들에 마비된 채
살아도 되는 사람처럼 살아서
살아 있는 것 같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닐 것이
—『천국어 사전』, 타이피스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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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
조성래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을 것처럼
흰 것들은
희구나
언제부턴가
착한 사람을 만나면
미안할 일이 닥쳐올 것만 같은
하얀 구름
하얀 파도
아무런 악의도 미움도 없었는데
심지어 사랑도 없었는데
한 남자가 자신의 시신을 끌고
해안선을 따라가네
—『천국어 사전』, 타이피스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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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무역 3공구 정류소에서
—증기선이나 합승 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 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 수단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서 간다는 것이지.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中
조성래
K가 사라진 이후 내 영혼은 그대로 허공에 업힌 자세다 몸만 멀쩡히 길거리를 돌아다닌다 밥을 먹는다 가끔 친구를 만나 웃다가 또 울지만, 내 영혼이
없는 그의 등에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나는 결코 이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한 책에서 니체는 달리는 마차에 뛰어들어 죽는다 비쩍 마른 말에게 채찍질하는 마부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니체가 무척 아플 적의 일화와 그의 죽음을 짜깁기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는 누구보다도 반듯한 자세로 누워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이 발간된 이후, 마차로 돌진하는 자세의 영혼을 지닌 니체가
어떤 이들의 상상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병상에 누워 있는 피투성이 니체의 발작적인 기침은 매 순간 마차로 뛰어드는 영혼을 가진 자의 몸부림 같다 이 열악한 장면이 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 어쩌면 마음속 한 사람의 불치병이 오래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조금은 추악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영혼이 어떤 자세를 지속하거나 반복한다면 결국 몸이 그것을 따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 이를 견디는 자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아침 여섯 시 이른 통근 버스를 탄다 누구도 그 부동자세의 침묵을 깨트리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낯선 인사 한마디에도 그들의 예민한 친절이 화들짝 선잠을 깨고 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런 인사치레는 일견 아무런 깊이도 없는 교감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조금은 귀찮고 불편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영혼이 어느샌가 K의 없는 등에서 내려와
내 몸의 걸음에 맞춰 어색하게나마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문득 알게 되었다 이 고마울 정도로 사소한 엇박자, 서서히 콧노래가 흘러나오던 출근길……
통근 버스 속 시간에 이 회복의 기점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천국어 사전』, 타이피스트, 2024.
언어적 기교보다 몸으로 체득한 삶의 근원적인 슬픔 < 현장+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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