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 기자
권민경 시인의 시집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가 문학동네 시인선에서 출간되었다. 시인은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에서 병마와 싸우는 실존적 고통 속에서도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으면서 삶과 죽음 그리고 세계 인식의 깊이와 품위를 보여주었다. 이어 두 번째 시집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에선 고통에 잠식되지 않으려는 초월적 담담함 대신 고통에 패배하여 막다른 곳에 도달한 자의 절망과 습기를 독자들에게 전해준 바 있다. 시인은 이번에 나온 세 번째 시집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로 그동안 보여준 실존과 세계관 그리고 스타일이 적절하게 통합된 균형감과 완성도를 갖추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인상적인 시인만의 감수성과 삶의 통찰을 보여주면서 편편마다 삶의 기운과 죽음의 필멸성이 서사적 역동성을 확보하고 있다.(박상수 시인, 문학평론가)
산문집 『등고선 없는 지도를 쥐고』 (민음사, 2023)에서 시인은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실존과 완전히 분리하여 그의 시를 읽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이다. 그럼에도 시집에 실린 시들은 고통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아닌, 시인만의 발랄한 발상과 시니컬한 유머와 키치한 표현으로 고통을 유희하고 있다. 권민경 시인의 시는 독자로 하여금 내밀한 연대감과 강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시에 빠져들게 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시인은 고통받고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웃고 농담하며 생명 쪽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선택한다. 시인에게 “눈물은 나의 굿즈”이며 “보석이 아닌 그냥 짠물”이고 “생리대 마냥 필수품”이다. 가끔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이기적으로 영생하고 싶은” “행방불명되고” 싶은 심리를 가지고 있다. “신도시를 만들 때 부록처럼 조경당”하고 “이 세상에 강제로 튀어나온” 것 같은 심정과 “나무는 쓸모인데 나는 무쓸모”한 것 같은 감정과 “나무 열매 쪼개지는 동안 박살나는 하트” 같은 슬픔이 시니컬과 리드미컬한 도약으로 독자에게 말을 건다. 이러한 시인의 독특한 시적 어감은 마치 곁에 있는 친구에게 건네는 말투 같아서 더욱 친밀하게 다가온다.
시집 속 화자는 2기 팬클럽을 꿈꾼다. 이 사후세계 팬클럽에서 시인은 신을 아이돌이라는 현실 세계로 끌어내린다. 끌어내린 개념은 시적 통찰을 통해 독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형성하면서 새롭게 확장된 세계관으로 솟구친다. 성스러운 믿음은 지친 삶 속에서 다시 탄생한다. 사후세계를 믿는 이상 죽음에 대한 언급이 지겹거나 금기의 목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권민경 시인은 생의 너머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중이다. 이러한 몸짓은 오래전부터 진행 되어 왔으며 현재를 넘어서 미래로 향하고 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2기 팬클럽
권민경
누군 죽음을 말하는 것이 이제 지겹다고 한다
더 중요한 건 뭘까
어떤 조각상은 눈물을 흘린다
우리도 흘리지만
속일 게 많다
꺼내놓지 못한 것들
내 안에서 부대끼는 소리
읊조림. 노래. 밀교의 기도문.
박해를 피해서 성모상을 관음상으로 속인 마음
그렇게까지 해야 했니
죽음을 견디며 신을 사랑한 마음을
팬심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 불경하다고 말해도
기도하는 사랑의 손길로 떨리는 그대를 안고*
모든 사소한 것들에서 읽는다
사랑이나 사랑 같은 것
동전이 반쯤 찬 돼지저금통 구슬을 넣은 페트병 구름과 구름의 하이파이브 삶이 죽음에게 튕기는, 팽 하고 당겨진 고무줄
순진한 사람들이 내뱉는 신성모독
사후 세계를 믿는 주제에
*조용필의 노래 <비련>의 첫 구절. 팬의 열광적인 반응으로 완성되는 도입부.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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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뛰는 심장 어디로
권민경
‘너와 나의 말발굽’
완성되지 못했으나 오래 남는 말 있다. 완성되지 못해서 남은 건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죠.
보이지 않는 곳 자르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상상 속, 외롭게 펄럭이는 한쪽 난소.
뭉툭하게 아물었던 갑상선 자리.
기타 등등으로 나는 조각났으나 보이지 않는다. 장기가 난 자리를 정체불명의 문장들이 메운다. 가령
‘너와 나의 말발굽’
달리는 말. 달리는 말. 예민한 말. 수틀리면 주인이라도 떨구는, 사실 주인이 없는 거대하고 무거운 생물. 가는 다리로 달리는 말들. 입에 편지라도 물고 뛸 거 같은
말에 집착하는 이유 여러 가지지만
옮긴 병원은 구파발에 있다.
마음에 문제가 있지만 눈에 보이진 않는다. 내 부족한 부분을 여러 알약이 메우는데
낱말처럼 여겨진다. 그게 내 안에서 굴러다니다
나는 모를 원리로 작용하는 것. 자기 약 설명서도 외우지 못하는데
이런 게 시인?
자기 시를 못 외운다고 낯선 사람에게 혼쭐난 경험쯤 한 번씩 있지요.
설명적인 지하철 3호선 달려간다.
안락사당한 경주마 무덤 앞에서 운다.
눈물은 나의 굿즈.
아무도 있었다는 것을 모르게 사라져버리기.
잘린 장기와 춤은 어디로 사라졌니.
경주마가 죽으면 그를 아끼던 사람이 편자를 취한다.
넌 어디로 갔니. 참담한 일을 당하면 말을 잃어버린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아무 일도 겪지 않았다.
안이 아무리 아파도 오리역을 지나 구파발에 가도 나는 직립한다.
‘시인이 하도 많아서 내가 사라져도 될 듯함’
조각난 나의 말.
뛰어내렸으나 솟구쳐올랐다.
어디에 닿을지 알지 못한다.
살아 있기에 쓰고 살아남기 위해 쓰는 일.
그저 자연, 아무것도 아닌.
우리의 말발굽은 누가 취하나?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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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
권민경
세상의 비참한 죽음을 접할 때
내가 죽어버렸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가슴을 치는 날이 많다 나는 할머니들처럼 엄마들처럼
운다 다른 방법을
내게 다른 방법을
제발이라는 말보다 진짜라는 말을 쓰면서 쫌이란 말을 쓰면서
나는 나에게 매달려 있다
내게 다른 방법을
겨우내 차가운 방
밖에선 자꾸 터지는 소리
손이 곱아서 글을 쓸 수 없는 시간
길어진다
가슴을 치는 날들 나는 몸이 아픈 게 아니라서
들어가지 마시오
주인백
주인 없는 나는
차가운 방
주먹이 가슴에 박히고
점점 몸안으로 끌려들어가고
들어가지 마시오
거긴 빈방이 분명하지만 가득할 것이다
차갑고 기분 나쁘고 얼어서 터져버리는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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