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윤 기자
정병기 시인의 세 번째 시조집이 출간되었다. 영화평론가이며 정치학자이기도 한 정병기 시인은 2016년 《나래시조》 시조 신인상, 2018년 《시와 표현》 시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그동안 시조집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시간 환상통』과 시집 『오독으로 되는 시』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 영화평론·분석 『사랑과 예술, 아모르파티: 시가 있는 영화 평론』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 등을 펴냈다. 현재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시, 시조, 영화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정병기 시인은 이 시조집에서 개성적인 발상과 실험적인 시 의식을 토대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고찰, 사회와 세계에 대한 탐구와 진단, 철학적 담론, 현실과 삶에 대한 통찰 등 다양한 주제를 작품에 녹여냈다. 이번 시조집은 총 68편의 시조를 네 개의 부로 나누었다. 숫자나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제목의 시조를 마지막에 배치하고, 한글 제목의 시조들은 모두 한글 자모순으로 배치했다. 독자들이 찾아보기 쉽기도 하지만, 특별한 의미 없이 이루어지는 편집과 구성의 인습을 탈피했다. 2020년 두 번째 시조집 발행 이후 발표한 작품 55편과 미발표작 13편을 엮었다. 영화평론가이자 정치학자이기도 한 정병기 시인의 삶과 철학이 시적 서정과 잘 결속되어 있다. 해설 대신 시조의 형식과 의미구조에 대한 고민이 ‘시조인의 고민’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시조학논총』에 게재된 논문을 변형한 것이다. 예술 작품으로서 시조를 감상하면서 학술적 고찰로서 시조에 대한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정병기 시인은 “시조의 정형률은 과연 무엇인가요?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의 구분, 장(章)의 의미 구조, 구(句)의 구성, 시행엇붙임(enjambement)의 허용 여부 등 고민해야 할 문제는 많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는 기본적으로 시조의 정형률을 토대로 합니다. 그런데 정형률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물음입니다. 적어도 제게는 이 질문이 시조인으로서 가장 큰 고민입니다.”라며 시조의 근본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와 새로운 개성이 돋보이는 시조집을 찾는 독자들에게 『산은 이미 거기 없다』를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빨간 꽃과 파란 꽃이 있었다
정병기
시들어 지고 나니
이제야 알겠다
빨갛거나 파래서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그저 꽃
꽃이었기에 아름다운 것이었다
—『산은 이미 거기 없다』, 목언예원,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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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일
정병기
낮달은 날마다 잔인한 채식주의자
손 없는 날이 되면 슬하의 성긴 별들을
계절의 이슬들인 양 하나씩 집어삼키고
밤 달은 밤마다 슬픈 낭만주의자
골 깊은 호수를 횡단하는 화사(花蛇)인 양
별들을 하나씩 토하며 차갑게 흐른다
당신은 말없이 창백한 이기주의자
그렇게 저 혼자 하늘로 오른 것이라면
낮밤이 바뀔 때마다 촉촉이 맺힐 수밖에
—『산은 이미 거기 없다』, 목언예원,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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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우, 무
정병기
1
다소곳 함께 하다 무를 떠난 우는
다른 무 앞에 서서 찬 하늘로 굳어 가고*
옆구리 허전한 무는 오늘도
맵싸한 향길 품는다**
2
자존심 강한 우는 무 뒤에 서기 싫어
맵싸한 향기 두고 미련 없이 떠났다
이제는 다른 무 앞에 서
울지 않는 하늘이다***
—『산은 이미 거기 없다』, 목언예원, 2024.
*우무=한천(寒天)
**박옥위, 「무는 우가 그립다」(『그 눈물자리마다 한 무더기 꽃 놓으며』, 책만드는집, 2019)
***‘한천(寒天)’에서 ‘한(寒)’은 ‘울지 않다’의 훈(訓)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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