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김휼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너의 밤으로 갈까』(시인의 일요일)를 펴냈다. 기독공보 신춘문예와 계간 《열린시학》으로 등단한 시인은 첫 시집 『그곳엔 두 개의 달이 있었다』 와 사진 시집 『말에서 멀어지는 순간』에서 시와 신앙이 접목되는 지점의 풍경과 우리네 삶을 넘나들며 궁구한 서정과 사유의 미학을 펼쳐 보였는데, 이번 세 번째 시집 『너의 밤으로 갈까』에서는 고요한 울림을 주는 시들을 섬세하게 형상화해 묵직한 슬픔을 독자의 심미안 속으로 번져오게 했다.
헤아리는 마음으로 사물을 오래 들여다보면 신비 아닌 것이 없고 기도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는 시인은 곁을 내밀하게 읽어내는 눈을 가졌다. 그래서 곁이라는 바깥을 깊은 고독을 가진 저장소로 인식하고 있다. 시인은 무너질 것만 같은 존재의 곁에 머물며 속마음을 내어준다. 원죄를 지니고 사는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들,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낸 후 빛을 얻는다고 해도 이미 상실한 것을 되돌릴 수 없다면 그 빛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무리 묻고 고민한다 해도 적절한 답을 구할 수는 없을 것임을 우리는 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였을 때 분노하고 탄식하는 것은 마땅히 필요한 노릇이지만, 그것이 과도한 격정이 되지 않도록 슬픔을 다스리는 것도 필요하다. 분노와 탄식 이후,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도록 단정함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시인이 수행해야 하는 바인지도 모른다고 이병국 시인은 해설을 통해 말한다.
또한 시인은 “귀가 깊어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일을 도맡”는 자이다. 바깥의 슬픔을 다독이다 자기 안의 슬픔을 앓게 되더라도 그 고통을 감내하며 버티려는 안간힘을 통해 “누군가 시름 깊은 방에 들어 푸른 잎사귀 몇 장 머리맡에 두고” 갈 수 있다면 “옹색한 옹이를 창 삼아 세상과 단절을 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구체적 슬픔의 안쪽에서 손을 내밀어 소소한 일상을 재건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돕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너의 밤으로 갈까』 는 수평과 수직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수평적 위치에 존재를 위치시켜 죽음을 상기시키고 수직적 형태로 삶의 희망을 맥락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시인이 표제시에서 보여준 것처럼 “진리는 항상 굽은 곳에 있”기에 “비탈을 살아내는” 기울기를 긍정한다. 그 기울기는 마치 이 세상을 “굽어살피는 신의 자세”로 타자를 향해 몸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한다. 그런 점에서 진리란 몸을 기울여 다가가는 행위에 있다는 것을 시인은 암시한다.
‘나’를 전유해 타자의 고통에 닿는 일을 대신하는 시인의 삶, 때로는 과한 안부에 지쳐 잠시 이곳을 떠나 저곳에 머물길 원해 보지만 미로와 같은 지리멸렬한 세상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타자의 곁을 지키고자 흘러내리는 결론을 붙들어 앉히는 모습은 희망의 자리로 우리를 옮겨 앉게 한다.
<시집 속 시보기>
에덴의 기울기
김휼
쫓기듯 떠나간 동쪽이거나
붉은 원죄를 간직한 당신 능선에 어둠이 내립니다
손끝에서 겉옷이 흘러내려요
알몸은 유혹적이에요 날로 먹고 싶은 경향이 있죠
칼과 사과, 승자와 패자는 목 가까이로부터 결정됩니다
드리거나 받는 형식을
둥글기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속으로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과를
사과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밤입니다
에덴은 기울기가 심하고 굴러떨어진 뒤 특히 빛이 납니다
죄짓기 좋은 밤을
무화과 잎사귀를 떼어 가리고 가뿐히 걸어갑니다
눈먼 자의 달콤함과 새콤함으로
과실은 무덤으로 난 비좁은 길을 가고 있으나
너무도 붉어서 놓아버린
반쪽, 당신의 사과
― 『너의 밤으로 갈까』, 시인의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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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성 슬픔
김휼
바람이 멈추면 내 슬픔은 구체적이 됩니다
봄 흙에 젖살이 오를 즈음 말문이 트였죠 태생이 곰살맞아 무성한 소문을 달고 살았어요 덕분에 성장기는 푸르게 빛났습니다
귀가 깊어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여름이 다 지나던 어느 날 번쩍, 하늘을 가르는 일성에 난청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며 살았습니다 해야 할 일만 하고 가야 할 곳만 갔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일에는 침묵하며 지냈습니다
참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직립은 퇴행성 슬픔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구부러지지 않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으며 뼈마디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가락 뼈들이 뒤틀리고 있지만 경탄을 잃지 않으려 식물성 웃음만 섭취해 보는데 오백 년이라는 치명적 무게를 가진 저로서는 피할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끔 은닉하기 좋은 새의 울음을 걸어두고 몽상에 듭니다
오늘은 청명, 누군가 시름 깊은 방에 들어 푸른 잎사귀 몇 장 머리맡에 두고 갑니다 시간이 갈수록 속으로 쌓이는 회한은 나이테를 감고 도는데 움켜쥐면 구체적이 되는 슬픔, 나는 지금 옹색한 옹이를 창 삼아 세상과 단절을 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신앙이 되는 것은 타당한 일입니다
― 『너의 밤으로 갈까』, 시인의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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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움 알레고리
김휼
알리, 없습니다
수만개의 꽃을 뭉쳐 하나의 꽃숭어리로 퉁치는 조물주의 내력
매운맛을 숨기고 활짝 펼쳐 보이는 환대의 깊이와
무한한 슬픔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벙글어진 저 웃음 사이가 얼마쯤인지
나는 알리, 없습니다
벼린 내 모서리들이 둥글어지고 있는 건 고요의 힘인지 짚을 길 없는 허방의 힘인지
일 지주로 서 있는 알리움의 위엄이 왜 이런 감정을 유발하는지
유발 하라리가 왜 입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지
기분 따라 바뀌는 내 생각의 반경을 나도 알리, 없습니다
안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인지
알 사람은 다 아는 일을 나만 모르고 있는 것과
내가 알 정도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아는 것 사이가 귀와 입처럼 멀고도 가깝다는 것
구근으로 번식하는 것들은 매운 울음을 왜 뿌리에 숨기고 있는지
맵다는 걸 알면서도 벙글어진 웃음에 자꾸 걸려 넘어지곤 하는 나는 알리움의 후예일까요
여러 겹의 표정으로 둘러싸인 호모 사피엔스
어디쯤에 마음을 두어야 위험이 비켜 갈지 알아 알음알이를 짓는 인간들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는 정말 뒷담화를 만든 걸까요
문득, 알리움에서 유발된 엉뚱한 표정의 서사
알 리 없는 물음에 방점만 커져 갑니다
― 『너의 밤으로 갈까』, 시인의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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