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이송희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대명사들」이 다인숲 출판사의 사설시조선 01번으로 발간되었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5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다인숲은 작가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표지를 순백으로 선택하고 코팅도 하지 않아 독자의 손때가 그대로 묻을 수밖에 없는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시집 제목은 청색으로 찍어서 우리 안에 빛나는 푸름을 형상화했다고 전한다. 이 책이 독자의 손에 닿아서 너덜너덜해지기를, 얼룩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송희 시인은 전남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연구재단 박사 후 국내 연수(Post―Doc,)를 마쳤다.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열린시학」 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지원금과 아르코 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신인상, 고산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대명사들」이 있으며, 평론집 「아달린의 방」,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거울과 응시」, 「유목의 서사」 등이 있다. 그 외 저서로 「눈물로 읽는 사서함」이 있으며, 편저 「한국의 단시조 156」, 공저 「2015 올해의 좋은시조」, 「한국문학의 이해」, 「기형도」, 「인문사회계열을 위한 글쓰기」 등이 있다. 현재 계간 「좋은시조」 주간이며,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평론과 창작, 대학 걍의와 인문학 강의, 문학잡지 편집주간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송희 시인의 사설시조집 「대명사들」은 사설시조의 특성인 시대의 목소리를 담았으며, 시조의 정형률과 사설의 자유로움이 조화를 이루었다. 중장이 길어진 형태의 사설시조는 양반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풍자·고발하기 위해 창작되었다. 평범한 인물을 중심으로 서민들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양식적 특성이 있다. 이송희 시인은 이 시대의 주인공인 민초들의 몸부림을 현대판 사설시조로 재치 있게 풀어냈다.
이송희 시인의 사설시조는 전통 사설시조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 현대시조가 가지고 있는 현장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담고 있다. 이송희 시인은 사설을 통해서 어두운 시대에 별빛 같은 질문을 던져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송희 시인은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상황을 해학과 풍자, 역설의 방식으로 그려낸다.
해설을 쓴 김학중 시인은 “이것이 이송희가 전통과 현대를 횡단하여 구축한 시적 세계로 성취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힘은 촛불의 빛에 가까운 것이지만 「대명사들」이 그렇듯 결코 단수가 아니"라 "여럿이며 동시에 거대한 하나이다.”라고 설명한다. 즉 주체는 파편화된 주체가 아닌 생의 추위로 인한 얼어붙음을 통해 순간일지라도 하나의 주체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여전히 나와 같은 추위 속에 있는 시간임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송희 시인의 서설시조집 「대명사들」은 오늘의 사설시조가 가져야 할 현실 참여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게 누구냐?
이송희
내 친히 갑옷 입고 시비를 가리겠노라
그 누가 나를 감히 무장공자(無腸公子 )라 했느냐 얼굴엔 번지르르 금가루 바르고 여우 털을 두른 네 속셈이 무엇이냐 안 보이는 손으로 민심의 목을 치고 백성들 주머니 털어 호의호식 하는 놈들 부드러운 말로 꼬셔 살랑살랑 꼬리 치며 단물만 다 빼먹고 문밖으로 내쫓는, 네 놈들의 시커먼 속에 들어앉은 속임수들
옆으로 걸어가면서 남 탓하지 말지어다
― 『대명사들』, 다인숲,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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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사들
이송희
그들과 저들 사이 내 자리는 따로 없다
부여의 사출도(四出道)인가, 개돼지로 불리면서 때 되면 밥 먹여주니 웅크리고 입 다물라 떠도는 유언비어 속 현행범이 되었다가 천하디천한 우리는 말 한 마리 값도 안 되고 그녀가 읽어가는 수첩 속 문장에선 우리는 또 저것들과 이것들로 흥정되고
이름을 잃은 우리는 대명사로 불린다
― 『대명사들』, 다인숲,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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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생(麴先生)의 취중진담
이송희
너희들의 이름은 고려 때부터 화려했지
주색 짙은 녀석들은 늘 그를 불렀지 모임마다 잎새주로 주가를 올렸지 수많은 주주들의 환심을 등에 업고 불타는 금요일엔 달리고 달리자 이 밤의 끝을 잡고 지화자 좋은데이! 술상을 두드리며 오늘도 처음처럼! 청하한 표정 속에 은밀한 유혹의 말, 참이슬 내릴 때까지 늘어지던 넋두리
술독에 빠진 길들이 내 발목을 붙드네
― 『대명사들』, 다인숲,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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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의 비밀
이송희
신인가수 춘향이 변사장에게 불려가네
암행어사 이도령을 기다리다 다 늙겠네 턱 깎고 코 세우고 사랑가를 열창하네 단막극에 주연이 된 신인배우 추월이 봐라 휘모리장단에 맞춰서 덩실덩실 춤을 추네 거품 많은 말들로 채워진 맥주잔을 밤새워 기울이며 팔자 한번 고쳐보자 온다던 이몽룡도 다른 여자 꿰찼겠지 감춰진 엑스파일만 뒷골목을 돌고 도네
옥중에 갇힌 날들이 어둠 속에 묻히네
― 『대명사들』, 다인숲, 2024.
이 시대의 주인공, 민초들의 몸부림을 현대판 사설시조로 풀어낸 시집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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