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윤 기자
중앙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한 정수자 시인의 시집 『인칭이 점점 두려워질 무렵』이 가히시인선 1번으로 출간했다. 정수자 시인은 1984년 세종숭모제전국시조백일장 장원으로 등단해 그동안 시집 『탐하다』 『허공 우물』 『저녁의 뒷모습』 『저물녘 길을 떠나다』 『비의 후문』 『그을린 입술』 『파도의 일과』 등을 발간했다. 그리고 중앙시조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가히 시인선〉이 출범한다. 새롭게 출범하는 시인선의 상징이자, 그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첫 번째 시집으로 정수자 시인의 『인칭이 점점 두려워질 무렵』을 펴냈다. 정수자, 라는 이름 자체로 하나의 계보가 되어버릴 만큼 그녀의 시조는 독보적이고 창의적인 세계를 구축해 왔다. 존재 자체가 한국 현대시조의 현주소이자 미래인 정수자의 시 세계. 이번 시집은 가장 완벽한 순간에 언뜻 시야에서 사라지는 별똥별처럼, 미학적 찰나와 동시에 길고 깊은 여백을 갖는다. 이번 시집을 읽게 되면 그 미학적 찰나와 여백이 독자의 머릿속에 깊은 여운과 상흔을 남길 것이다.
해설을 쓴 오민석 문학평론가는 “오랜만에 큰 그림의 시들을 만났다. 정수자의 시들은 메시지에 사로잡혀 절절매지도 않고 표현을 궁구하느라 겉멋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대상을 넉넉히 껴안고도 남을 언어의 거대한 그물을 세계에 던진다. 그것은 클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섬세하고, 완결을 지향하면서 완결을 의심하는, 완성과 회의의 탄탄한 그물이다. 그것은 확고한 중심을 견지하면서 대상을 향하여 아름다운 비례의 날개를 던진다. 그것이 사물을 포착할 때, 가장 잘 들어맞는 것들끼리 부딪힐 때만 낼 수 있는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어떤 ‘삑사리’도 허락하지 않는 그녀의 정확한 투구는 비례의 왕국에 도달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전적 기술이다.”라고 하며 정수자 시조가 지향하는 작품성, 미학성, 완결성 등을 분석했다.
추천글을 쓴 문태준 시인은 “정수자 시인의 시는 장쾌하다. 군말 없이 곧장 직입하는 언어가 시원시원하다. 뿐만 아니라 각(刻)하듯 정교하게 꼭 들어맞게 고른 언어의 빛은 하나하나 눈부시다. 시행의 뒤편에 맑게 생겨나는 여운에는 향기가 그윽하게 돈다. 참으로 오랜만에 시의 고상한 격조와 예지를 이 시집에서 만나게 된다.”라고 말하며 정수자 시가 갖는 개성과 품격을 주목했다.
시조의 정수와 개성, 품격, 미학적 자리를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인칭이 점점 두려워질 무렵』을 추천한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칼
정수자
야밤에 칼을 샀네, 비색에 홀려 들어
오늘의 운세 삼아 입술이나 대볼까
꿉꿉한 묵언 끌탕이나 채로 진탕 쳐볼까
직입은 똑 놓치면서 푸념만 후 늘어져도
대낮에 칼을 품고 나갈 일은 없을지니
쪼잔히 노염이나 썰어 바람길에 뿌려볼까
― 『인칭이 점점 두려워질 무렵』, 문학의전당,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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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밑줄
정수자
저녁을 일찍 하니 저녁이 길어졌다
외등도 조곤조곤 곁을 더 내주고
접어둔 갈피를 헤듯
책등들이 술렁였다
등불과 친해지면 말의 절도 잘 짓는지
하품 같은 농 끝에도 코가 쑥 빠지지만
저녁에 길게 들수록
행간은 더 붐비리
가을의 질문 같은 동네 책방 창문들도
길어진 모서리를 모과 모양 밝히고
누군가 밑줄을 긋다
별로 솟곤 하리라
― 『인칭이 점점 두려워질 무렵』, 문학의전당,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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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한 날
정수자
촐촐히 속이 비면 말개지는 느낌이야
제삿날 올리던 놋접시의 무나물이
슴슴히 둘레를 괴며 달무리를 흉내 내듯
말 많은 모임에선 뭇국조차 못 사귀고
그냥 마냥 걸으며 홀로나 더 맑히듯
촐촐히 멍한 날이면 뭔가 이룬 기분이야
― 『인칭이 점점 두려워질 무렵』, 문학의전당,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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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같은 미학적 찰나와 길고 깊은 여백 - 미디어 시in
정지윤 기자 중앙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한 정수자 시인의 시집 『인칭이 점점 두려워질 무렵』이 가히시인선 1번으로 출간했다. 정수자 시인은 1984년 세종숭모제전국시조백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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