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1998년 《시안》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병초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를 걷는사람 시인선으로 출간했다. 시인은 그동안 시집 『밤비』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와 시 비평집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와 역사소설 『노량의 바다』를 상재했는데, 이번 시집은 8년 만에 낸 시집이라서 독자의 기대가 크다.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에서 이병초 시인의 언어는 고향(전라북도)의 토속 언어와 서정에 기대어 있다. 포근한 어머니의 품, 첫사랑의 따스함 같은 감정들을 토속 언어로 풀어낸다. 거기에 냉철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는 시도 선보인다. ‘농성일기’라는 부제를 단 3부에서는 대학 비리를 고발하는 주체로서 천막 농성을 하며 느낀 감회를 뼈아픈 세상살이에 빗대어 써 내려간 기록을 시화시켰다.
전라북도 방언은 부드러우며 된소리가 별로 없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말을 할 때 마치 노래하듯 ‘겁~나게’, ‘포도~시(겨우)’ 등과 같이 늘여 빼는 가락을 넣는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리듬감이 이병초의 시에서는 그리움을 증폭시키는 기저로 작용한다. 간조롱히(가지런히), 짚시랑물(낙숫물), 눈깜땡깜(얼렁뚱땅), 깜밥(누룽지), 당그래질(고무래질) 같은 말들이 되살아나 우리의 귀를 저편으로 트이게 하고, 입술을 쫑긋거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맑은 눈으로 발견한 “오디별”, “시냇물벼루” 같은 표현들이 그림처럼 선연히 그려지며 우리 앞에 한 자락의 시냇물을 데려다 놓기도 한다.
해설을 쓴 정재훈 평론가는 “아무리 “내 몸과 마음이 처음부터 유배지”(「코스모스」)였다고 해도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쌀알”처럼 작은 빛 때문이었습니다. 연약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일용한 양식들은 하나같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고, 이것들은 계속해서 살아 있으라는 신호가 되어 내 머리 위로 똑똑 떨어집니다.”라고 짚으며, 이병초의 시가 품고 있는 온기를 ‘사지(死地)에서 온 편지’라고 표현했다.
추천사를 쓴 김근 시인의 말대로 “이 시집의 페이지들을 차례차례 넘기며 섬세한 언어로 빚은 사람과 풍경 들을 거쳐” 시가 독자를 향해오는 걸 느낄 수 있다. 오랜만에 심미안을 넓혀주는 섬세한 언어의 아름다움을 만나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는 의미있는 시집으로 기록될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글씨
이병초
풀잎에 간조롱히 맺힌 이슬이 네 글씨 같다
오디별이 뜬 시냇물벼루에 여치 소리나 갈다가 가끔 눈썹에 이는 바람결 시린 바람결 간추려 풀잎의 눈을 틔웠으리
사는 게 뭔지 밤 깊도록 구슬구슬 맑아지는 글씨들
―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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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자
이병초
학교 가려고 전봇대 뒤에서 버스 기다리는데 그는 보도블록에 맨몸을 깔았다 내가 담배를 빼무니 저도 담배를 빼문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니 저도 땀을 닦는다 바닥이 지글거려도 물 한 모금 달라는 소리가 없다 녹다 만 쓸개간장을 더 납작하게 지지는가 보다
―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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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저
이병초
서랍 틈예 끼어 독 먹은 것처럼 까매진 은수저를 수세미에 치약 묻혀 닦았다 박박 문지를수록 까만 거품이 일었다 물로 헹구니 반짝반짝 때깔이 났다
창틀에 뽀얀 먼지를 주저앉히는 빗소리, 은도금이 덜 벗겨진 흐린 빗소리 가지런히 누이면 난 누구의 무덤 속 부장품 같았고 거미줄 뒤집어쓴 얼굴 같았고 은수저 저 혼자 반짝반짝 빛나기도 했다
―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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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2
이병초
취를 누가 다 뜯어가 버려서 두어 줌 훑어 온 솔잎 깔고 돼지 목살을 삶습니다 냇내 묻지 말라고 불땀을 죽여서 삶습니다 고기 익는 냄새에 생솔 연기가 배어 정지문은 흰 김을 물었습니다
나는 불길에 재 덮어 불땀을 좀더 죽인 뒤 도톰한 목살을 새우젓에 찍을 것입니다 소주가 입에 쩍쩍 들어붙겠지요 고기도 눈쩔에 바닥나고요 그 전에 당신이 오면 좋겠습니다 소주병에 비친 꽤 처진 시간일랑 버려 두고 생솔 연기의 눈물 나는 낭만을 당신이 맛보면 더 좋겠습니다
―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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