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16년 《스토리 문학》으로 등단한 이형근 시인은 현재 담도암 말기 환자다. 그가 방사선 치료를 받는 힘겨운 투병 중에 끌어올린 빛나는 시혼으로 첫 시집 『연어, 꿈을 연주하다』를 출간했다.
이형근 시인은 자서에서 “시작(始作)에서 시작(詩作)의 무대로 나아가기까지 ‘이게 시일까? 정말 시를 쓸 수 있을까? 시가 나에게 무엇일까?’란 의구심이 들면서 겉돌기만 하고 들여다보면 아프기만 하고 아프면 이겨내야 하는데 용기가 없고 챙겨야 할 게 많아 자신이 없고 그러다 그냥 쉬면서 한참을 놓아 버렸고 절실한 시점에 와서 보니 마음에 와닿지 않은 시답지 않은 시조차 소중해서 모아둔 원고를 시집으로” 묶었다면 시집 발간에 대한 절실한 소회를 밝혔다.
김순진 문학평론가는‘성실과 봉사로 다져진 평판의 시학’이라는 제목의 작품해설에서 이형근 시인의 작품 세계를 ‘첫째, 치열한 삶의 관찰, 둘째, 노래를 통한 삶의 관조, 셋째, 절망과 희망 사이’ 등으로 요약했다. 이형근 시인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시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살아온 지점을 언술한 것인데, 그 지점에서 건져 올린 상상력이 “시적 혜안을 갖춘 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고 “완성도가 출중하다고 평가”했다.
김분홍 시인은 추천사에서 “‘노숙’, ‘남구로역 인력시장’, ‘홈리스의 홈’, ‘어느 자영업자’, ‘이 시대의 아버지’, ‘황태記’ 등의 시에서 그동안 시인이 살아 온 쉽지 않았던 시간의 함의를 파악 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시인의 진성성 넘치는 “어휘들을 통해 그 당시 언중들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삶을 여행에 비유하며 “여행이 언제 끝날지는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다. 힘든 여행이 되겠지만 나는 이형근 시인이 이 시집에서처럼 낭만 열차에서 내리지 말고 여행을 계속할 수 있길 기도”한다고 덧붙였다. 진심으로 시인의 쾌유와 문학적 여정의 순항을 바라고 있었는데, 그 기원이 반드시 현실에서도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더치커피
이형근
나의 커피는 달콤한 초콜릿 입술 라떼 아트입니다
갓 구워낸 은밀한 미소는 머그에 감미로운 아로마를 새겨 넣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드립커피에 빠져있었죠
이제, 밤하늘에 불꽃이 쏟아지고 다문화축제가 시작됩니다
나의 레시피는 라크리마, 눈물입니다
검게 그을린 아프리카 예가체프는 깔끔하면서 부드러운 풍모를 드러냅니다
스모키한 매력의 인디오 파카마라는 엘살바도르에서 왔습니다
중후한 분위기의 바디감은 인도네시아 만델링을 따를 수 없습니다
라크리마는 아메리카노, 라떼와도 잘 어울리죠
가끔은 에스프레소로도 변신해요
자꾸 흐려지는 기억 속에는 쉽고 가벼움만 있었습니다
슬퍼할 기력조차 없어 앉은뱅이 세월을 보듬고 어두운 길로 나갑니다
뜨거움을 거부하는 건 순전히 나의 의지였기에
차디찬 목마름을 기억하며 익숙지 못한 인습을 벗어던지던 아픔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눈물로 기다립니다
밤마다 저린 그리움이 사무쳐 살며시 목을 조릅니다
지난 봄 핸드드립에 빠졌던 기억은 성숙이었죠
하여 차가운 흔들림에 심장 한쪽을 떼어내는 쓰라림을 겪었습니다
숨겨둔 비밀이 있었나요
깊은 동굴을 따라 흘러내리는 주옥 구슬은 숙성된 와인입니다
황제‘블루마운틴’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맛을 음미하며
똑똑 눈물을 떨굽니다 절대자 네로처럼
— 이형근, 『연어, 꿈을 연주하다』, 문학공원,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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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의 성분
이형근
나의 멍자국은
태어나 처음 만나
응애응애 소리 지를 때 얻은 주어입니다
옹아리 적에는 누구라도 찾아주기 바라며
안아주고 사랑한 동사로 빛을 발했으며
유년기까지 약하디약한 무늬는
여리게 아주 여리게 조금씩 퍼져나간 형용사입니다
까르르까르르 웃는 아기에게
까만 밤 하얀 별은 조사며
울어도 울어도 사라지지 않는
푸른 점은 영원한 접미사입니다
엷어지고 엷어지는
이 특별한 자국은 어떻게 생긴 걸까요
머나먼 우주 미지의 항성에서
고운 생명체로 온 부사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고 알고 있던 파생어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모두 같은 백성 같은 민족 아닐까요
모르는 사람들은 접두사로
홍콩 북경 산동과 같이 불러보지만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 접속부사처럼
모두는 나의 먼 태생을 기억 못합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면 엷어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보조어간이 되기에
— 이형근, 『연어, 꿈을 연주하다』, 문학공원,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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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이형근
희불그스름한
여명 속에 눈을 감고 있었다
아침을 기다린다고 생각했는데
늦여름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백 년쯤
꿈을 꾼 것 같은데
마른 삭정이처럼
죽은 줄 알았는데
정말 죽어서 좋다고 말했는데
펑펑 불꽃을 터트리며
솜사탕처럼 환하게 웃는데
그때 느꼈네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네
다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도로 눈을 감으면
깊은 파문이 번져 나가고
진한 향기가 퍼져 나가고
소리 없이 꽃비가 내리고
뜨거운 아스팔트는 선홍빛으로 물들고
— 이형근, 『연어, 꿈을 연주하다』, 문학공원,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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