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22년 《계간 파란》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마윤지 시인이 첫 시집 『개구리극장』을 민음사에서 출간했다. 『개구리극장』에선 사물과 현상을 관통하는 시인의 맑은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은 자극적이거나 도발적인 시선이 아니라 안쪽과 너머를 섬세하게 어루만질 때 다가오는 따뜻한 예감 같은 것이었다.
마윤지의 시를 이루는 것은 일상이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과 장소들이다. 시인이 호명하는 사물들을 만지고 그 장소에 함께 머물고 나면 알싸한 맛이 남는다. 맑고 간결한 시어들이 잃어버린 기억을, 묻혀 있는 것들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언뜻 평온한 세계에 남은 잔상. 그 잔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생생한 유년의 장면들과 해소되지 않은 죽음이 떠오른다. 한 겹 아래 우리가 들여다보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는 인식, 묻어 둔 채 잃어버린 것을 찾아내고 늦지 않게 슬픔을 건져 올리는 손길이 매력적이다.
마윤지 시집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장소성 내지는 공간성에 대한 특별한 시적 인식이다. 표제작 「개구리극장」의 개구리극장은 시인이 독자들을 의미 있게 데려가는 장소다. 죽은 사람이 개구리가 되어 만나는 이곳에서는 “언제든 자신의 죽음을 다시 볼 수” 있다고 화자는 언술한다. 저마다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어두운 극장에서 어린 시절에 했던 천진한 약속이 그때와 같은 무게로 떠오르고 오롯한 슬픔이 떨어져 나온다. 고요하고 생기로운 개구리극장에는 울고 웃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이가, 그걸 “반짝이는 죽음”이라고 이름 붙인다. 떨어져 나온 슬픔을 늦지 않게 낚아 올리려는 다정하고 찬찬한 시선이 개성적이다.
대다수의 시인들은 첫 시집에서 자신이 체험한 유년을 어떻게 시로 풀어낼까, 고민하게 된다. 마윤지에게서도 유년의 정서는 특별한 시적 모티브를 제공하는 또 다른 ‘시공간’이다. 이 유년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언급했다.(<예스24> 인터뷰에서)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도 많이 사랑했어요. 안아 보기까지 오래 걸렸고요. 아주 맑은데도 종종 그늘에 혼자 앉아 있는 듯한 작은 사람들도 보았어요. 맑아서 그늘이 더 잘 보였어요. 옆에 앉고 싶다, 내가 모를 걱정이어도 앞머리를 쓸어 올려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라고 말했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유년에서 길어 올린 트라우마나 개별적 상처를 아프게 혹은 극단적으로 담아내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그것을 뛰어넘는 방식이다. 유년의 정서를 “제가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것을 자꾸 말하게 되었다”고 밝힌 마윤지만의 방식을 알고 싶다면 기꺼이 『개구리극장』에 주목하길 바란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오랑은 사람 우탄은 숲
마윤지
동물원에 간 어린 내가
고슴도치
나라고 생각하는 것
거북이
엄마가 먼저 본 내 모습
돌고래
절대 같아질 순 없다고
괜찮아 만져도 돼
오랑은 사람
우탄은 숲이란 뜻이래
나는 무서운 듯
뒷걸음질 치며
가까이 갈 수 없어
망칠 수 없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수많은 벽돌
아이가 던지고
아이가 받은
내가 무너뜨릴 수 없고
내가 쌓을 수 없는
만질 수 없는 것을 사랑한다는 건
다행인 일이지만
밤 새워 달리는 두 마리의 말은 언제나
가슴 속으로 돌진 해오며
― 『개구리극장』, 민음사, 2024.
--------
스키 캠프
마윤지
분명 배낭에 넣었는데
누가 훔쳐간 거야
내가 제일 아끼는 신발
꼭 이런 아이가 한 명씩 있었다
그럼 나는 무서운 이야기랍시고
신발을 도둑맞으면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야 한대
오늘처럼 추운 날 귀신들이
옷장 안
침대 밑에도 숨긴다고 하더라
산 중턱
오갈 수 없는 폭설 속에서
사람들은 종일 스키를 타고도
또 눈을 보려고 커튼을 활짝 열어 둔다
너 그럼 이제 누구로 살아?
조그만 내복과 양말을
가지런히 말리며
혀에 눈을 받는다
녹아 사라진다
나도 모르지
날이 밝아
아이들이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돌아간다
눈을 비비며
서로의 신발을 뒤바꿔 신고
― 『개구리극장』, 민음사, 2024.
----------
개구리극장
마윤지
비 오는 날 극장에는 개구리가 많아요
사람은 죽어서 별이 아니라 개구리가 되거든요
여기서는 언제든 자신의 죽음을 다시 볼 수 있어요
때로는 요청에 의한 다큐를 함께 보고요
주택가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관한 상영 114분
들키지 않고 우는 방법에 관한 재상영 263분
그러나 역시 최고 인기는
새벽녘 같은 푸른 스크린 앞
부신 눈을 깜빡이며 보는 죽음이에요
손바닥을 펼쳐 사이사이 투명한
초록빛 비탈을 적시는 개구리들
우는 것은 개구리들뿐이지요
이젠 개구리들도 비가 오는 날에만 울지요
의자 밑
인간들이 흘리고 간 한 줌의 자갈
그것이 연못이었다는 이야기
떼어 낸 심장이 식염수 속에서
한동안 혼자 뛰는 것처럼
떨어져 나온 슬픔이
미처 다 걸어가지 못하고
멈추기 전에 낚아야 해요
내가 나를 본 적도 있을까요?
개구리이기 이전에요
영화 속 불운은 내 것이 아니라고 믿었을 때요
나는 극장에서 사람 구경을 자주 해요
사람들이 어둠 뒤에 숨어 울고 웃는 걸
반짝이는 죽음이라고 이름 붙였거든요
영화 좋아해요?
극장에 올래요?
― 『개구리극장』, 민음사, 2024.
마윤지 시인의 첫 시집 『개구리극장』 민음사에서 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담도암 말기 투명 중에 끌어올린 빛나는 시혼 (0) | 2024.05.11 |
---|---|
이 저녁 천지간에 그리움을 깔아놓는 일 (0) | 2024.05.11 |
‘시를 사는 시인’ 고성만 시인이 펼치는 시의 진경 (0) | 2024.05.07 |
단시조가 지닌 미학성을 알고 싶다면 김일연 시인의 시평집 『시조의 향연』을 읽어보길 (0) | 2024.05.07 |
임채성 시인의 네 번째 시조집 『메께라』 열린시학정형시집으로 출간 (0) | 2024.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