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윤 기자
오종문 시인의 시조집 『봄 끝 길다』가 이미지북 시조선 1번으로 출간되었다. 오종문 시인은 1960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나 1986년 사화집 『지금 그리고 여기』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했다. 시조집 『오월은 섹스를 한다』 『지상의 한 집에 들다』 『아버지의 자전거』 6인 시집 『갈잎 흔드는 여섯 악장 칸타타』 가사시집 『명옥헌원림 별사』와 기타 저서들이 있고 중앙시조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오종문의 새 시조집 『봄 끝 길다』는 한결같이 기억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길어 올린 미학적 결실이다. 시인의 기억은 지나온 시간의 세세한 결을 선연하게 재현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치러온 낱낱 경험을 원초적 형식으로 복원해 간다.
오종문 시인은 스스로[自] 그러한[然] 존재자들의 빛과 그림자, 드러남과 사라짐의 양면성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표현함으로써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다양한 시선과 필치로 발화해 가는 그의 사유와 감각을 통해 정형 양식의 단정함 속에서 치열한 현재형을 일구어 가는 그의 시작 과정을 한껏 경험하게 된다.
또한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직조되는 오종문만의 가열하고도 유니크한 그리움의 목소리를 만나게 된다. 이처럼 오종문 시인은 정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기억의 뿌리를 찾아가는 구심적 언어를 들려주는 동시에, 견고함과 생동감을 결속한 에너지를 통해 가장 섬세한 현재형의 언어까지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 할 것이다.
오종문 시인은 이러한 해석과 성찰의 작업에 자연 사물을 적극 끌어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네들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생명 원리가 되게끔 배열하고 은유해 간다. 인간 이성이 고양되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미망을 넘어, 그러한 오도된 욕망을 하나씩 허물어 나간다. 그래서 그는 일종의 생태적 사유를 흔치 않은 열정으로 보여주면서, 보다 나은 공존 원리를 모색하는 상상적 기록을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 우리도 그의 시조를 읽으면서 우리를 둘러싼 생명들에 대해 사유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궁극적 세계 이해에 스스럼없이 가닿게 되는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한 시대의 범례(範例)가 되는 시조 작품들은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인생론적 경향을 띠면서 고전적 성정과 깨달음을 우리에게 하염없이 전해준 것이다. 오종문 시조 역시 이러한 고전적이고 인생론적인 질감과 무게를 지니면서, 섬세한 사유와 감각을 거느리고 있는 우리 시대 정형 미학의 대표 사례일 것이다.”라고 평했다.
이 봄, 시인이 그려낸 아름다운 파문과 사랑의 에너지를 느껴보자. 봄 끝이 길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달빛 서재
오종문
손만 살짝 닿아도 갈잎처럼 바스라질
어둠 속 별을 가둔 무량한 이 고요함
누추한 바람 서재에
만월 달빛 찾아왔다
발정난 들고양이 긴 밤을 밀어올리고
두꺼운 책장 속에 수자리 선 낱말들이
세상이 너무 궁금해 마음 길을 내고 있다
변새邊塞 뻐꾹새 울음 산처럼 무거워서
참나무 잔가지를 부러뜨리는 고단한 날
큰 나라 백성이 되어
개활지를 내달린다
— 『봄 끝 길다』, 이미지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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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파접罷接
오종문
한 권의 시집 속에 탈고된 성전의 봄
얼마나 많은 꽃이 피기도 전 스러졌던가
하늬 끝 칼날을 지나
구름 밟고 떠났던가
삼월과 오월 사이 태어난 사생아 같은
치열한 세상 하나 마음 끝 오르기까지
구름을 연못에 던진 바람의 몸 보았다
심장의 체온이 흐른 은유의 꽃숭어리
홀로 꿈꾸게 한 것 품을 수 있었을 때
얼룩진 독백을 접고 사랑 하나 들였다
와락 안아도 좋을 숨이 멎는 골목 달빛
눈빛 너무나 깊어 눈물에 이르지 못한
봄 그늘 앉기도 좁은
강물 소리 참 멀다
— 『봄 끝 길다』, 이미지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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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아래서
오종문
지상에 떨어지는 한 잎의 푸른 저녁
망초꽃 숨겨 놓은 천기를 읽으려고
달무리 바람의 뼈들 운행하는 별을 본다
드넓은 우주 평야 참혹한 꽃 은하수
진화를 계속하는 별 궤적의 결을 따라
켜켜이 흙먼지 생이 움칠 몸을 뒤척인다
홀로이 먼저 떠난 봄꽃도 늦는다는데
사람 기다리는 일 뭐가 그리 어려울까
상처 난 별자리들이 와락 품에 안긴다
— 『봄 끝 길다』, 이미지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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