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기자
2020년 《시와 경계》 가을호에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혜연 시인의 첫 시집 『근처에 살아요』가 도서출판 애지에서 나왔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상실과 슬픔이다. 비극적으로 사라진 이들과 아물지 않는 상처를 평생 목도하며 살아가는 이들, 여전히 상처받으며 살고 있는 타인들의 비밀일기 같다.
시인은 삶의 비애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얼음송곳 같은 예리한 감각과 상상력으로 개성적인 시세계를 빚어낸다. 다양하게 변주되는 새롭고 활발한 언어로 불공평한 세상을 비관하거나 원망하고 있을 타자들에게 위무의 속삭임과 희망의 서정을 감각적으로 확장해 간다.
김혜연 시인은 춤추는 예술가이다. “언어로 춤추는 진짜 춤꾼, 글자들을 모아놓고 상상력의 댄스를 추는 시인”(오광석 시인)이라는 문우들의 평가답게 문학적 리듬과 호흡하며 눈물을 삼키는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기다리는 것들을 향해/ 결국 오지 않을 것들을 향해/ 춤이 기도이니”(「Lento」)라거나 “박수소리도 들리지 않는 변두리에서/ 변주 구간 하나 없는 서사를 완곡하는/ 당신은 슬픈 차차차”(「당신은 슬픈 차차차」)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아름답고도 처연한 춤사위 같은 언어로 흡인력 강하게 독자를 끌어당긴다.
표제작 「근처에 살아요」는 오랜 시간을 삶의 주변인으로 외롭게 떠돌다 보면 ‘우리’라는 말의 실체에 공허를 느끼기 마련인데, 내게도 김밥을 싸주던 ‘당신’이 있었음을 떠올리며 “그래서 종종만 외로울 수 있구나”라는 진술로 모성의 감사와 사랑을 담은 연서이다. 아픔을 이기며 무럭무럭 잘 살아내고 있는 시적 의지를 그려낸다.
시인의 슬픔은 신산스런 삶을 살다 돌아가신 부모에서 비롯하는 듯하다. 「당신은 귀뚜하미」, 「양말은 반쪽의 아버지를 신고」, 「「우물의 입술을 닦는다」 등의 시는 부모를 향한 죄책감과 고백의 기록으로 애틋하다. 「게슈탈트」는 꿈에서 만나는 다른 세계의 여러 ‘나’, 즉 나와 닮은 듯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으나 그만큼 풍요로운 나를 꿈꾸는 시이고, 「세이렌-뱀의 발성」은 평범한 일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살아가야 하는 나와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의 간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발문을 쓴 현택훈 시인은 “이 시집은 눈물 어린 수학 문제집이다. 어느 여학생이 밤새 시험공부를 하며 밑줄을 긋고 여백에 삶의 문제를 푼 낙서 가득한 문제집 말이다.
유년 시절부터 김혜연 시인을 옥죄어 온 불행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사슬을 풀지 못한 채 유일한 해방일지가 된 시로 연명을 하는 셈이다. 시인은 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지 춤으로도 발화한다. 시가 마음이라면, 춤은 몸으로 연과 행의 손짓과 발걸음을 보여준다.”고 적었다.
서안나 시인은 “이 시집의 미덕은 공동체에서 축출되는 결핍된 존재의 고통을 섬세하게 조명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공동체에 합류하지 못하는 존재가 감내하는 고통을 동음이의어와 펀(fun), 수학적 용어인 약분, 기약분수, 괄호, 개성적인 비유와 수사라는 다양한 장치를 통해 시적 정조와 감성을 유감없이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김혜연 시인은 댄스 강사로 현재 댄스학원을 운영 중이다. 다양한 음악을 듣고 안무를 하다 보면 춤과 문학, 춤과 시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고 한다. 첫 시집이 더뎠던 만큼 창작의 열정을 벼리며 춤과 문학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삼거리 조명가게
김혜연
전구 하나 주세요
마당 구석으로 돌아 들어가는 화장실
성화에 못 이겨
눈 비비며 끌려 나온 동생의 하품
네모난 창 너머의 달 조각
동그란 무릎을 닮은 밤의 말랑함을 주세요
스탠드 하나 주세요
시를 끄적이던 여백
쉽사리 잠들지 못하던 초록 간지럼
비밀의 범벅과 슬픔의 속눈썹이 깜박이던
새벽의 목덜미 그 은은함을 주세요
샹들리에를 주세요
삐걱이는 마룻바닥 위에서 흔들리는
바라보고 있노라면 빛에 중독되어
마시고 마셔도 빛으로 빈 잔을 채워야하는
빛을 마실수록 깊게 하강하는 그림자
내가 나의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가장 까만 대낮의 우울을 주세요
어깨까지 젖은 날이면
뛰쳐 들어가고 싶던 어둠의 소실점
이제는 켜지지 않는 삼거리에서 내가
빈 채로 끌려다니며 문득문득 내가
까물까물 꺼져버려요
나를 켜주세요
꺼지지 않는 빛을 주세요
— 『근처에 살아요』, 애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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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귀뚜하미
김혜연
귀뚜라미야
귀뚜하미
귀뚜하미가 아니라 귀 뚜 라 미 라고
귀 뚜 하 미
당신은 당신을
모른 체한다
또 속는 나의 부유물들이
내 안에서 응결된다
당신의 필체를 닮은
쇠약한 변론들
나의 숲은 잊힌 계절에도
불면의 울음들로 따갑다
귀뚜라미가 운다
당신의 눈동자를 닮아
가장자리가 찢긴 나의 꿈 안에서
귀뚜하미가 온다
염원을 일찍 배워버린
아이를 닮은 비극처럼
당신은 지워진 연못
당신은 당신인 체하는 고요
당신은 자주 모른 체하고
나는 자주 속아
자주 당신스럽다
가난한 정렬의 우리가
웨죽웨죽 웃으며 귀뚜하미
웨죽웨죽 울며 귀뚜라미
— 『근처에 살아요』, 애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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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살아요
김혜연
토끼에게 줄 당근을 씹어 본다
내 입맛은 몇 번쯤 바뀌었나
동물원에 못 가본 내가 쪼그려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토끼는 건성건성 당근을 씹는다
살아요, 라고 말할 때
죽음이 떠다닌 건 몇 해쯤 되었나
죽음이라는 게
당근처럼 한낮처럼
토끼처럼 당근이 씹히지 않는다
나는 긴 표정으로
토끼는 짧은 꼬리로
낯가림을 하고
작은 숨을 쉬지만
풀은 죽지 않는다
근처에, 라고 대답할 때
우리가 되지 못하는 나도
우리,
그 근처에 있구나
그래서 종종만 외롭구나
근처로 소풍 갈 때면
당신이 싸준 김밥이 아직 따뜻할 때면
당근을 쏙 빼어 한쪽에 모아둘 때면
맛있었다는 말에 당신이 웃어줄 때면
괄호 같은 당신이
오후를 깰 때면
살아요 살아요
살아져요
기약분수처럼 남겨진
내가
아무렇지 않게
— 『근처에 살아요』, 애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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