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스 외 2편
오석화
너무 이르게 도착한 양떼는 모두 얼어죽어
한낮의 수영장 바닥 물그림자에 묻혔다 플라스틱 야자잎을 향해
플립 턴, 오픈 턴, 헤엄도 칠 줄 알았구나 너희가
나를 남겨두고 먼저 도달해버린 것이다
프로젝터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선지자처럼
빛이 보는 것과 내가 보는 빛이 서로를 외면하고
고무공의 탄성이 해변에 속하는지 뜨거운 입김에 속하는지
존경하는 홍학은 원체 말이 없으셨다
전망대를 향해 수직으로 솟구치는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생 동안의 히트맵이
아무리 내려보아도 알 수 없으니까 열어보지 않은 과육이라면 거기 박힌 달콤함 거기 박힌
손목과 팔꿈치를 넘어
전신을 타고 흐르는 체액 속에서도 둥둥 비어있는 마음
호루라기 소리 예를 갖추어 반복되는데
뻗은 팔이 수심을 넘지 못했을 때
온 구멍을 통해 육박하는 것이 있다
나섬을 알고
물러섬을 모르는 말들이 나머지 세계를 끌고 옵니다, 거기
몇 개의 레인이 깔리고 몇 개의 코트가 펼쳐집니까
파라솔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누워있으면 가끔 땅속에 들어있는 기분이 든다
너희도 반갑구나 구석구석 나를 핥는구나
새들이 흘리고 간 조류를 따라 수천 킬로미터를 왕복하는 머리통이라면
장관입니다 우리의 군락이
대를 잇기에 앞서
소개령이 떨어지고
꽁꽁 싸맨 사람들 매점과 상점으로 몰려드는데
너무 익어 머리 위에서 퍽 퍽 소리와 함께 터져나가는 야자
그것 보라고! 모든 게 몸에 꼭 맞는 인조
무덤 속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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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
오석화
저기 개가 부서져 있어,
조각공원과 가장 먼 곳을 가리키며 네가 말한다 드물게 맑은 날들이 이어졌으므로 다양한 생물의 생장이 목격되었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조서를 적고 있다
하나의 노트에 두 개의 펜으로 혹은
하나의 들판에 네 개의 다리로
달리고 있었습니까? 일어서려고 했나요 가능할 것처럼? 프리스비가 풍경을 가르고 비눗방울이 그것을 따르고 나무둥치 기암괴석 그밖에 또 묘사할 것이 있습니까? 개들은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봅니다 태어나 이런 구경은 처음 해본다는 듯
좋은 구경입니다
총천연색의 개의 잔해가 들판의 완성에 기여합니다
우리는 개를 키워본 적이 없고 앞으로 어떤 생물도 키울 생각이 없지만
다 잘 자라는군요
사체는 타는 쓰레기 뼈는 음식물 아니듯
잔디에 드러누우면 봄이고 가을임을 압니다, 본능입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불리하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산책로에 지장(指章)은 많으니 챙겨들 가시고
…… 부서진 개는 아직 발각되지 않은 채입니다 개들은 부서진 개를 알아보는 것을 거부합니다 웃을 때도 울음소리밖에 내지 못하므로 정상적인 진술이 어렵습니다
가득 찬 노트를 덮고 우리가 툭툭 손 털고 일어서도
아무런 적개심도 만들 수가 없었다 개가 포함된 장면으로는 다 자란 개의 황동색 눈에는
프리스비, 음각된 증언을 따라 고여 있는 들판
네 개의 들판에 하나의 다리로
빼곡한 미제(未濟)를 너와 번갈아 적었습니다 들려요? 인간의 소리를 닮을까 조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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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머신
오석화
공원에는 다양한 종류의 기계들이 산다
기계는 나른해지는 법이 없고
재생되며
무엇을 배회할 것인가의 문제에 천착한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시절
가장 좋은 목에 자리한 벤치는
대부분 비어있다
나무 밑에서 배우고 놀라던 모든 것들
미워하는 마음 없이도 죽일 수 있던 작은 것들
자신의 금속성에
무심한 잎과 잎들이 맞부딪힐 때
숙면을 바라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동작의 빈곤한 가짓수
잠 속에는 가로세로가 없다
단 것을 삼키고 실수처럼 앓아누운
미래 대신 우리가
미래 대신 우리가
쌓아올렸던 미래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쓰러지는
머신
비둘기
날아오르는
도랑을 따라 흘러가는 도랑의 부속들을 본다
악천후의 귀여움에 모처럼 다 같이 웃었다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어른아이 외 2편
조은영
접질린 발목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 병은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달리는 아이처럼 이유가 없다
습지에 담긴 쇠기둥은 나무 바닥을 받치고 있다 발에 힘을 주고 걷는다 녹물이 번지고 거미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생을 만든다
물억새는 어젯밤 꿈을 감추고 하얗게 센 머리카락만을 나부낀다 저절로 이는 파문을 보며 새들만이 지저귄다
가만히 있는 자세를 배운 적이 없다 습지에 몸을 담근 것들을 흉내 낸다 두 손을 몸통에 바짝 붙여보다가 뒷짐을 진다 오른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옮겨보지만
물기 없는 하늘이 소리를 삼키고 있다
습지로 둘러싸인 난간에 기댄 몸을 곧게 편다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에 닿는다 가을 모기의 날갯짓
얼굴을 핥은 악몽 뒤에 머리카락이 또 자랐다
얇아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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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술
조은영
철제 파티션 위로 아크릴 이름표가 꽂혀 있다
차지한 면적만큼 숨의 길이를 가진다
제대로 불러본 적 없는 이름 위로
눈이 쌓인다
같은 넓이를 가진 공간에 몸을 말고 들어간 사람들
섬에선 큰 목소리는 작아지고 작은 목소리는 커진대
언제부턴가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엎드려 혼잣말을 했을 뿐이다
파티션 너머 다른 온도
데스크 매트와 정리함
보안 필름으로 가려진 모니터
어제 잊어버린 인사가 생각났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눈이 멀지도 몰라
파티션 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물방울을 움켜쥔 공기가 내려앉고
피가 느리게 돈다
등 뒤에서 서성이는 발자국들을
굽은 등으로 밀어낸다
이름표 위로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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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헐적 연주회
조은영
피아노 앞에서 횡격막을 본다
메트로놈이 호흡을 조절한다
셋잇단 음표가 웃는 걸 알아차린 적 있니
당신의 주름을 손끝으로 만져본다
탈출이 반복된다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여 세상을 보면
음표들은 꼬리를 휘날리며 달려든다
어떻게 죄책감 없이 소프트 페달을 밟나요?
포로가 된 침묵을 구해준다면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까
허물어진 보표에 음표를 그린다
동그랗게 말린 모양으로
음에 꼬리를 다는 사람
건반을 끝까지 누르지 않아도
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페달을 밟는다
음표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왼손에 첫인사를 올려두고
파를 누른다 깊이 가라앉는 건반
가장 먼 건반을 잇는 이음줄
피아노 앞에는
동그랗게 굳어져 음을 지우는 사람이 있다
미래의 종 외 2편
이기현
생물이 되어가고 있어
반성을 아는
같이 살래?
물어오면 포장지처럼 매끈해지던 얼굴
감싸고 싶어서 건기의 그늘을 닮기로 했지
그게 욕심이었을까
습기처럼 달라붙는 반성이
미래를 연습하는 방식이 되었어
스크린 도어에 비친 너와 추돌했던
열차는 네게 어떤 미래를 전달해 주었니
홀로 종점의 개찰구를 나오면서
발을 벗으면 맨발이 되고
얼굴을 벗으면 민낯은
파도가 멈춘 바다처럼 조용했는데
그날이 기념일과 같아서 나는
낡은 기억도 선물이 될까 해서
손이 손을 놓쳐서 생긴 손으로
시든 꽃다발 들고 미래에 도착해 있어
너는 자주 넘어지던 사람
내가 물건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으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헤엄치듯 다가오던 너는
바닥 속으로 들어가 해묵은 기억들을
보물처럼 건져 바닥 위로 널브러뜨렸지
거기서 바다 냄새가 나서
그중 하나를 집어
오래 슬픔을 솎아내다 보면
어엿한 추억이 되어 반짝이곤 했는데
같이 살 수 있을까?
되물으면 대답 대신 너는
알몸을 벗고
물에 가까워졌고
이제 나는 너의 몸짓까지 잊어야 했던
네가 전달 받은 미래의
스크린 도어 안으로 들어와 있어
너의 투명성을 믿으려고
여기, 반쯤 투명해진
어느 종의
아주 긴 반성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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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요리사
이기현
변방을 찾는 자들이 데스 휘슬을 불며 시스투스가 불을 지른 언덕을 내려오고 있다 비명을 삼키며 비대해지는 저녁이 변방을 그림자로 드리울 때 당신은 드디어 내게 열쇠를 내밀며 집에서 나가라 했고 나는 짐을 싸는 대신 두 손으로 눈을 감쌌는데
내 마음속엔 입이 있어서 불안이 음주를 하곤 했지 거실에서 식기들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날이면 잠든 척하는 내 옆에 토그 브란슈를 내려놓고 식칼을 쥔 채 나를 노려보는 그림자가 있었지
그림자에도 그을리는 마음 때문에 무엇이든 들이부어야만 했지 술 취한 마음은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시스투스의 발화를 예감했고 그날그날의 통증을 어딘가에 보관했는데 그곳이 당신의 집이었지 나의 작은 지옥이었지 당신은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들만 요리하는 사람이어서
매일같이 나는 죽어서도 썩고 싶지 않아서 악마와 함께 춤을 추고 싶었다 차라리 악마가 되고 싶었다 당신이 절대 알 수 없었을 어떤 고통은 외상이 없어서 활기차 보였겠지 죽은 후에도 춤을 추는 동영상 속의 인물처럼
나는 공포를 느끼기 전에 이미 공포에 포섭되어 있었다 넌 내가 사랑해서 그렇게 얌전하구나 말하며 당신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 운석을 생각했다 이 변방의 거대한 충돌을 생각했다 살이 뜯긴 자리에서 살이 생겨나는 게 살아있다는 통각이라면 뜯겨 나간 살에서 살이 자라나는 것은
죽어서도 당신을 증오하겠다는 의지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창밖으로 조명처럼 언덕이 불타고 있고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비뚤게 눌러쓴 토그 브란슈를 다잡는 당신의 손짓과
데스 휘슬을 불며 나의 지옥으로 입장하는 악마들이 있다
드디어 나의 지옥에도 비교할 수 있는 고통이 생겼는데
이 지옥에는 열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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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두사
이기현
침울한 숲이 울창하구나 얘야, 우린 같은 불행을 공유하고 있구나 이 숲을 벗어나려면 슬픔도 보폭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겠지 발을 가지고 싶어 하는 나무들도 이곳엔 있을 거란다 낙과처럼 떨어지는 밤이 길을 뭉개며 지우기 전에 우리 갈림길이 나오거든 갈라서기로 하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자꾸나 누가 먼저 음식을 삼키든 우리의 뱃속은 일렬로 만족스러울 거란다 얘야, 고목들이 바람을 빌려 불행을 저울질하더라도 걸음을 멈추어선 안 된단다 실은 저녁을 먹을 집이 없다는 걸 들켜서도 한 끼의 식량도 돌봐줄 존재도 없다는 걸 들켜서도 안 된단다 이 숲을 이루는 건 모두 적막을 실토한 것들이므로 얘야, 있어야 할 것들이 없다는 건 네 불행이 아니라 우리의 불행이란다 그러니 비밀이 몸 한구석에서 영롱하더라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단다 갈림길은 나오지 않고 우린 숲의 출구에 도착했구나 우리는 같은 불행을 공유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실은 서로의 불행을 슬퍼하다가 함께 걸을 발이 생긴 거였구나 숲 밖의 밤은 완연하고 우리 함께 돌아갈 곳을 찾자꾸나 얘야, 그것 또한 우리의 불행이겠구나
*자료 제공 _ 계간 《열린시학》
오석화 시인 조은영 시인 이기현 시인 편 < 젊은 시인의 시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오석화 시인 조은영 시인 이기현 시인 편 _ 작품론 _ 황치복 평론가 (0)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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