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치복
1. 비인간적 시선이 초래하는 것
신인들의 매력은 무엇보다 시단에 새로운 상상력을 가져와서 문단에 자극과 활력을 주어 그것을 활성화시키는 능력일 것이다. 물론 독자적인 시적 세계와 시에 대한 관점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개인의 작시술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문학장에 새로운 충격과 경악을 초래하고, 그리하여 그러한 파문을 통해서 문학장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할 때 시인의 존재 의의는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새롭고 조망해 볼 오석화, 조은영, 이기현 시인은 최근 시단에 등장하여 개성적인 목소리와 시선, 독창적인 상상력을 선보이고 있는 신인이다. 그들은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시적 세계를 창출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시적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들의 목소리는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또한 개성적인 삶에 대한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그동안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과 태도로 시적 사물과 대상을 포착함으로써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2020년 <현대시>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온 오석화 시인은 무엇보다 비인간적인 태도, 혹은 냉철한 제3의 시선이라고 할 만한 관점을 시적 공간에 도입함으로써 독특한 시적 풍경들을 산출하고 있다. 시인은 비인간적(non-humanism)인 관점, 혹은 반인간적(anti-humanism)인 관점을 취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의 시적 장면들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인간이라는 자기중심적인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려고 하며, 이때 인간은 사물이나 동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객관적인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중심적인 생각에서 탈피함으로써 다양한 시적 전통이 갱신되고 새로워진다. 무엇보다 인간의 눈이 아닌 제 3의 시선을 설정함으로써 인간의 특권적인 권리가 상실되고, 인간은 사물과 같은 객관적인 관찰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개들은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봅니다 태어나 이런 구경은 처음 해본다는 듯”(「파견」)이라는 표현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인간은 관찰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의 파편화, 혹은 모든 대상들이 독립함으로써 독자적인 세계상이 설정되고 그러한 세계상들이 공존하는 어떤 장(場, field)들의 파편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독립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존재자들의 세계가 공존하고 그것들을 통어할 시선이나 권력이 부재하기 때문에 세계는 우연성과 파편성에 의해서 지배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오석화 시인의 시편들이 파편적인 사건들과 이미지들의 나열, 혹은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이러한 시선의 독자성, 혹은 세계의 파편화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특권적 권리의 상실과 객체들의 독립성, 그리고 객관적 대상들의 주체적인 세계상과 그로 인한 세계의 우연성과 파편화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비둘기 머신」이다. 거기에서 시인이 “공원에는 다양한 종류의 기계들이 산다/ 기계는 나른해지는 법이 없고/ 재생되며/ 무엇을 배회할 것인가의 문제에 천착한다”라고 했을 때, 공원이란 사람들이 운동을 하기 위해서 찾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기계들의 생활공간이 되며, 당연히 그 공간의 주인공은 기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신의 금속성에/ 무심한 잎과 잎들이 맞부딪힐 때/ 숙면을 바라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동작의 빈곤한 가짓수”라는 구절을 보면, 금속성의 기계와 나무의 잎과 인간이 모두 각각 독립성을 지닌 채 자신의 세계를 살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사물과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들이 각각 독립한 채 이루는 세계는 우연성과 파편성이 지배하는 세계인데, 이때의 시 쓰는 작업이란 그것들을 하나의 시적 공간에 배치함으로서 특정한 풍경을 창출하는 것이다. 다음 작품이 이를 잘 보여준다.
너무 이르게 도착한 양떼는 모두 얼어죽어
한낮의 수영장 바닥 물그림자에 묻혔다 플라스틱 야자잎을 향해
플립 턴, 오픈 턴, 헤엄도 칠 줄 알았구나 너희가
나를 남겨두고 먼저 도달해버린 것이다
프로젝터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선지자처럼
빛이 보는 것과 내가 보는 빛이 서로를 외면하고
고무공의 탄성이 해변에 속하는지 뜨거운 입김에 속하는지
존경하는 홍학은 원체 말이 없으셨다
전망대를 향해 수직으로 솟구치는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생 동안의 히트맵이
아무리 내려보아도 알 수 없으니까 열어보지 않은 과육이라면 거기 박힌 달콤함 거기 박힌
손목과 팔꿈치를 넘어
전신을 타고 흐르는 체액 속에서도 둥둥 비어있는 마음
호루라기 소리 예를 갖추어 반복되는데
뻗은 팔이 수심을 넘지 못했을 때
온 구멍을 통해 육박하는 것이 있다
나섬을 알고
물러섬을 모르는 말들이 나머지 세계를 끌고 옵니다, 거기
몇 개의 레인이 깔리고 몇 개의 코트가 펼쳐집니까
파라솔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누워있으면 가끔 땅속에 들어있는 기분이 든다
너희도 반갑구나 구석구석 나를 핥는구나
새들이 흘리고 간 조류를 따라 수천 킬로미터를 왕복하는 머리통이라면
장관입니다 우리의 군락이
대를 잇기에 앞서
소개령이 떨어지고
꽁꽁 싸맨 사람들 매점과 상점으로 몰려드는데
너무 익어 머리 위에서 퍽 퍽 소리와 함께 터져나가는 야자
그것 보라고! 모든 게 몸에 꼭 맞는 인조
무덤 속의 일이었다
―「듀스」, 전문
이 시의 시적 공간에 시적 주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를 남겨두고 먼저 도달해 버린 것이다”라는 표현이나 “내가 보는 빛”, 그리고 “너희도 반갑구나 구석구석 나를 핥는구나”라는 구절을 보면 발화의 주체로서 시적 주체가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시적 공간에 등장하는 대상들을 온전히 통어하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시적 공간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식물, 혹은 동물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행동한다.
가장 먼저 양떼가 있는데, 그것은(그것은 양떼구름의 환유일 수 있다) 너무 이르게 도착하여 모두 얼어 죽게 되고, “존경하는 홍학은” 말이 없이 침묵하고 있다. 또한 “나섬을 알고/ 물러섬을 모르는 말들”은 “나머지 세계를 끌고 오”기도 하며, 새들은 조류를 흘리며 날아간다. 그들은 각각 개별적인 존재자들로서 주변의 환경에 대해 무반응으로 대응하며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거절한다. “프로젝터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선지자처럼/ 빛이 보는 것과 내가 보는 빛이 서로를 외면하고”라는 표현이 시적 공간에 존재하는 대상들의 존재방식과 관계양상을 응축하고 있다. “존경하는 홍학은 원체 말이 없으셨다”는 표현 또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변화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과 연관이 없는 존재자들의 존재양태를 대변해준다.
이처럼 시적 공간에 등장하는 대상들이 모두 파편화되어 있다고 해서 전체적인 구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처럼 아무런 연쇄나 연관을 지니지 않는 대상들이 공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혼돈(chaos)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시에서는 “듀스”라는 제목과 수영장을 둘러싼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듀스(deuce)란 일반적으로 경기에서, 양 측의 점수가 정해놓은 점수에서 한 점 모자라는 동률일 때 적용되는 규칙으로 배구, 탁구, 테니스 등의 경기에서, 승부가 결정되는 점수에 한 점을 남기고 양편이 동점이 되는 상황을 지칭한다. 물론 ‘듀스’라는 기표는 이러한 스포츠 영역에 한정되는 기의만을 지닌 것은 아니어서 둘이라는 카드나 주사위를 의미하기도 하고, 재앙이나 액운을 뜻하기도 하며, ‘도대체’, ‘제기랄’ 등의 다양한 문맥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와 관련시켜 보면, ‘듀스’라는 기표는 두 대상의 실력이 비슷해서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 그래서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있기에 두 대상은 대등한 상태에서 공존하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대상들은 ‘듀스’의 상태에 있는 셈이다.
한편 시적 구도를 보면, 이 시는 “한낮의 수영장 바닥”에서 시작하여 “꽁꽁 싸맨 사람들”이 “매점과 상점으로 몰려드는” 상황에서 끝난다. 그 과정에서는 “플립 턴, 오픈 턴”과 같은 “헤엄”이 등장하기도 하고, 탄성이 높은 “고무공”, “해변”, “뻗은 팔”과 “수심”, “레인”과 “파라솔”, 그리고 “조류” “야자” 등이 등장한다. 이러한 시적 구도는 이 시가 바닷가에 위치한 수영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일어나는 행동이나 사건은 수영을 하는 행위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구도에서 볼 때, 이 시의 시상의 전개란 시적 주체가 물 위에 떠서 부유하면서 떠다니듯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상념들이 전개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적 주체는 상상 속으로 명멸하는 다양한 대상과 사건들을 물 위를 떠다니는 부표처럼 출렁거리도록 임의로 맡겨놓고 있는 셈이다. 한 편을 더 읽어보자.
저기 개가 부서져 있어,
조각공원과 가장 먼 곳을 가리키며 네가 말한다 드물게 맑은 날들이 이어졌으므로 다양한 생물의 생장이 목격되었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조서를 적고 있다
하나의 노트에 두 개의 펜으로 혹은
하나의 들판에 네 개의 다리로
달리고 있었습니까? 일어서려고 했나요 가능할 것처럼? 프리스비가 풍경을 가르고 비눗방울이 그것을 따르고 나무둥치 기암괴석 그밖에 또 묘사할 것이 있습니까? 개들은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봅니다 태어나 이런 구경은 처음 해본다는 듯
좋은 구경입니다
총천연색의 개의 잔해가 들판의 완성에 기여합니다
우리는 개를 키워본 적이 없고 앞으로 어떤 생물도 키울 생각이 없지만
다 잘 자라는군요
사체는 타는 쓰레기 뼈는 음식물 아니듯
잔디에 드러누우면 봄이고 가을임을 압니다, 본능입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불리하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산책로에 지장(指章)은 많으니 챙겨들 가시고
…… 부서진 개는 아직 발각되지 않은 채입니다 개들은 부서진 개를 알아보는 것을 거부합니다 웃을 때도 울음소리밖에 내지 못하므로 정상적인 진술이 어렵습니다
가득 찬 노트를 덮고 우리가 툭툭 손 털고 일어서도
아무런 적개심도 만들 수가 없었다 개가 포함된 장면으로는 다 자란 개의 황동색 눈에는
프리스비, 음각된 증언을 따라 고여 있는 들판
네 개의 들판에 하나의 다리로
빼곡한 미제(未濟)를 너와 번갈아 적었습니다 들려요? 인간의 소리를 닮을까 조심하면서
―「파견」, 전문
역시 독특한 오석화 시인의 시적 발상과 비인간적인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듀스」라는 시와 마찬가지로 이 시 또한 조각공원, 혹은 산책로에서 산책을 하면서 보는 장면들, 그리고 거기에서 연상되는 다양한 상념들이 시적 공간을 채우고 있다. 시상의 전개는 부서진 개의 조각상을 보면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서 일정한 임무를 주어서 사람을 보내는 일을 의미하는 파견(派遣)이라는 기표가 ‘부서진 개’를 의미하는 파견(破犬)으로 해석된다. 그리하여 시상은 부서진 개의 내막과 파장을 조사하고, 그 조서를 작성하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이 시에서도 역시 관점의 전도가 일어나며 인간의 관점과 개의 관점이 착종되는 혼란한 상황이 발생한다. 전체적인 구도에서 “하나의 들판에 네 개의 다리로” 조서가 작성되던 관점이 “네 개의 들판에 하나의 다리로” 조서가 작성되는 구도로 바뀌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자연과 생물의 관계에서 자연의 수동적인 역할이 능동적인 것으로 변모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연과 개의 대립구도에서 개가 자연의 일부로 편입되고, 자연이 배경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변화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주체적인 인간의 시각을 해체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인간의 주체적인 시각의 해체는 “개들은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봅니다 태어나 이러한 구경은 처음 해본다는 듯”이라는 구절에서 관찰의 주체가 개가 되어 인간을 관찰하는 구도에서 명확해진다. 이러한 시적 진술에 이어서 시적 주체는 “좋은 구경입니다/ 총천연색의 개의 잔해가 들판의 완성에 기여합니다”라고 말하며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시각을 드러내는데, 이러한 관점은 다시금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인간의 소리를 닮을까 조심하면서”라는 구절을 통해서 전복되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가 인간중심주의라는 휴머니즘적 사고방식을 비판하기 위한 시라고는 할 수는 없다. 시적 주체는 조각공원과 산책로에 있는 다양한 조각상들(그 중에는 부서진 개의 조각상도 있을 것이다)과 “다양한 생물의 생장을” 감상하기도 하며, 개들은 “웃을 때도 울음소리밖에 내지 못하므로 정상적인 진술이 어렵습니다”라고 생각하면서 개들과 소통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개들 또한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보”면서 “본능”에 따라서 “프리스비”를 쫓으며 달려간다. 그리고 조각공원과 산책로를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 “고여 있는 들판”이 있는데, 그것은 부서진 개의 조각상을 자연의 일부로 만들면서 자신의 본성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각각의 사물과 대상들이 “부서진 개”의 부분처럼 파편화 되어 존재하면서 “빼곡한 미제(未濟)”로 남아 있으며, 그러한 미제의 사건과 사물들을 조각공원과 산책로가 포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오석화 시인의 시적 공간에서 인간적인 시선, 특권적인 주체의 시각이 붕괴되자 그 동안 그늘 속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수많은 대상들이 꿈틀거리면서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섬세한 관찰과 정교한 이미지
2020년 <시인수첩>의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등장한 조은영 시인은 삶의 미묘한 국면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세밀한 묘사를 통해서 정교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에 특장점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특히 「간헐적 연주회」를 보면 미묘한 음색과 소리의 파장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삶의 감각과 심리적 파문까지 읽어내는 놀라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셋인단 음표가 웃는 걸 알아차린 적 있니/ 당신의 주름을 손끝으로 만져본다”는 표현이나 “어떻게 죄책감 없이 소프트 페달을 밟나요?”라는 표현들을 보면, 음색이 지닌 표정이라든가 그것을 연주하는 연주자의 내면까지 읽어내고 있으며, 피아노의 소리에서 윤리적 감각까지 포착하는 내면 심리를 볼 수 있다. 또한 “포로가 된 침묵을 구해준다면/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까/ 허물어진 보표에 음표를 그린다”는 표현을 보면 소리가 일으키는 파장과 효과, 그리고 그것이 지니는 종교적 의미까지 더듬어 가는 시인의 사유를 발겨할 수 있다. 이처럼 조은영 시인은 대상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 그것이 지닌 함의와 파장을 읽어내고, 섬세한 이미지의 무늬를 통해 그것을 표현하는 데에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다음 작품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접질린 발목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 병은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달리는 아이처럼 이유가 없다
습지에 담긴 쇠기둥은 나무 바닥을 받치고 있다 발에 힘을 주고 걷는다 녹물이 번지고 거미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생을 만든다
물억새는 어젯밤 꿈을 감추고 하얗게 센 머리카락만을 나부낀다 저절로 이는 파문을 보며 새들만이 지저귄다
가만히 있는 자세를 배운 적이 없다 습지에 몸을 담근 것들을 흉내 낸다 두 손을 몸통에 바짝 붙여보다가 뒷짐을 진다 오른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옮겨보지만
물기 없는 하늘이 소리를 삼키고 있다
습지로 둘러싸인 난간에 기댄 몸을 곧게 편다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에 닿는다 가을 모기의 날갯짓
얼굴을 핥은 악몽 뒤에 머리카락이 또 자랐다
얇아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어른아이」, 전문
어른아이를 뜻하는 키덜트(kidult)라는 신조어는 현대 성인들이 추구하는 재미(Fun), 유치함(childish), 판타지 등의 가치가 대중문화의 하나로 나타난 콘셉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본래는 사회적으로 독립심이 부족하고 결단력이 없는 나약한 어른을 뜻하는 용어이다. 물론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어른아이란 어린아이와 같이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어른으로서, 그가 지닌 삶의 굴곡지고 소외된 한 국면을 정교한 이미지를 통해서 묘사하고 있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어른아이로서의 삶의 모습을 “습지에 담긴 쇠기둥”의 이미지라든가 “하얗게 센 머리카락만을 나부끼”고 있는 “물억새”의 이미지, 그리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생을 만드”는 “거미”의 이미지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특히 기둥 사이에서 생을 만드는 거미의 이미지는 기둥 사이에 거미줄을 치고 먹잇감이 걸리기를 기다리는 거미줄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특성을 부조하면서 어른아이의 삶의 양상을 절묘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의존적이고 무기력한 어른아이의 삶의 모습은 이미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어휘와 구절들의 어감을 통해서도 실현된다. “이유가 없다”라는 구절, 그리고 “저절로 이는 파문”이라든가 “가만히 있는 자세” 등의 의지적이지 못하고 무기력한 이미지, “배운 적이 없다”거나 “흉내 낸다” 등의 타성적이고 의존적인 의미를 함축한 구절들이 모두 어른아이의 삶의 양상과 태도 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물기 없는 하늘이 소리를 삼키고 있다”는 표현이나 “얼굴을 핥은 악몽 뒤에 머리카락이 또 자랐다”는 묘사들도 무기력한 어른아이의 모습을 구체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러한 묘사들은 모두 어떤 명증한 계기나 흔적도 없이 소멸해 가는 모습을 구상적으로 보여주기고 하고, 악몽과 같은 불안과 공포가 소용돌이치는 내면의 풍경을 구체화함으로써 어른아이의 삶이 지닌 간난(艱難)과 신고(辛苦)를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묘사의 향연을 보고 있으면, 조은영 시인이 지닌 섬세한 관찰력과 정교한 묘사의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다음 작품도 그러한 찬탄을 자아낸다.
철제 파티션 위로 아크릴 이름표가 꽂혀 있다
차지한 면적만큼 숨의 길이를 가진다
제대로 불러본 적 없는 이름 위로
눈이 쌓인다
같은 넓이를 가진 공간에 몸을 말고 들어간 사람들
섬에선 큰 목소리는 작아지고 작은 목소리는 커진대
언제부턴가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엎드려 혼잣말을 했을 뿐이다
파티션 너머 다른 온도
데스크 매트와 정리함
보안 필름으로 가려진 모니터
어제 잊어버린 인사가 생각났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눈이 멀지도 몰라
파티션 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물방울을 움켜쥔 공기가 내려앉고
피가 느리게 돈다
등 뒤에서 서성이는 발자국들을
굽은 등으로 밀어낸다
이름표 위로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쌓인다
―「방어술」, 전문
이 시 역시 「어른아이」가 보여준 놀라운 관찰력과 통찰력, 그리고 섬세한 이미지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다. 방어하는 기술이나 전술을 의미하는 제목인 “방어술”은 무엇을 방어한다는 것일까? 물론 방어하는 것은 자신을 괴롭히거나 위협하는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시의 시적 맥락을 살펴보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과 같은 생존 현장, 즉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무직 노동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한 방어가 문제가 되고 있다.
사무직 노동자가 처한 환경은 철저한 보안과 배타적 경계가 일상화된 직장인데, 그처럼 배타적이고 감시적인 환경은 “파티션 너머 다른 온도/ 데스크 매트와 정리함/ 보안 필름으로 가려진 모니터”라는 정교하고 가지런하지만 냉철하고 비정한 사무실 기기들과 그것이 지닌 정서적 성격의 이미지를 통해서 정확히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무원의 정체성을 대변해주는 이름표가 “차지한 면적만큼 숨의 길이를 가진다”는 표현을 통해서 사무실이란 하나의 생존투쟁을 위한 정글이자 밀림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밀림에서 삶의 방식은 철저한 고립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파티션 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는 표현이 그러한 삶의 방식을 대변해주고 있으며, “물방울을 움켜쥔 공기가 내려않고/ 피가 느리게 돈다”는 표현은 그러한 삶의 방식이 재배하는 사무실이라는 밀림이 지닌 삭막하고 무거운 분위기와 암울한 정조를 암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삭막한 공간에서의 생존전략, 즉 방어술은 무엇일까? “섬에선 큰 목소리는 작아지고 작은 목소리를 커진대”라는 시적 주체의 내면을 드러내주고 있는 표현이 “철제 파티션”으로 구획되어 있는 사무실의 특성과 방어술을 집약하고 있다. 사무실은 일종의 섬처럼 고립되어 있고 숨 막힐 듯이 좁은 한정된 공간이라는 것, 그렇기에 큰 목소리는 작아지고 작은 목소리가 커진다는 것, 곧 생존하기 위해서는 작아지는 큰 목소리에 주목해야 하며, 작은 목소리가 커진다는 사실에 유념해서 타자에 대한 험담과 뒷담화를 자제하고 절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해주는 것이다. “등 뒤에서 서성이는 발자국들을/ 굽은 등으로 밀어낸다”는 표현 또한 생존전략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표현은 철저한 고립과 외면이야말로 최선의 방어술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름표 위로/ 아무도 밟지 않는 눈이 쌓인다”는 이미지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미지란 아무런 흔적도, 위상도 없이 소멸해가는 모습, 이름표가 눈 속에 덮이듯이 그렇게 하염없이 혼자만의 고독 속에 잠겨드는 모습을 연상하도록 한다. 「어른아이」와 「방어술」이 문제 삼고 있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이 매우 비관적이고 외설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섬세하고 포착하고 그려내는 이미지는 정교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3. 인간관계의 파국, 혹은 그로테스크의 미학
2019년 <현대시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온 이기현 시인은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독특한 시적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기이하고 그로테스크한 시적 상황과 이미지, 그리고 그러한 시적 효과를 자아내는 시적 제재를 선택하는 안목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은 그의 시를 읽으면 마친 한편의 괴기스러운 호러물의 영화나 SF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 일어나도록 한다. 예컨대 「쌍두사」라는 시는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이라는 신화에서나 있을 법한(물론 실제로 미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기괴한 동물을 소재로 해서 독특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는데, 그 시적 제재 자체가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공포와 불안감을 느끼도록 한다. 물론 “낙과처럼 떨어지는 밤이 길을 뭉개”고 있는 이미지라든가 “고목들이 바람을 빌려 불행을 저울질”한다는 이미지, 그리고 “몸 한구석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비밀” 등의 시적 장치들이 제목에 걸맞은 효과를 산출하고 있기도 하다. 다음 작품은 이러한 공포와 호러의 정서를 산출하는 잔혹극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변방을 찾는 자들이 데스 휘슬을 불며 시스투스가 불을 지른 언덕을 내려오고 있다 비명을 삼키며 비대해지는 저녁이 변방을 그림자로 드리울 때 당신은 드디어 내게 열쇠를 내밀며 집에서 나가라 했고 나는 짐을 싸는 대신 두 손으로 눈을 감쌌는데
내 마음속엔 입이 있어서 불안이 음주를 하곤 했지 거실에서 식기들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날이면 잠든 척하는 내 옆에 토그 브란슈를 내려놓고 식칼을 쥔 채 나를 노려보는 그림자가 있었지
그림자에도 그을리는 마음 때문에 무엇이든 들이부어야만 했지 술 취한 마음은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시스투스의 발화를 예감했고 그날그날의 통증을 어딘가에 보관했는데 그곳이 당신의 집이었지 나의 작은 지옥이었지 당신은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들만 요리하는 사람이어서
매일같이 나는 죽어서도 썩고 싶지 않아서 악마와 함께 춤을 추고 싶었다 차라리 악마가 되고 싶었다 당신이 절대 알 수 없었을 어떤 고통은 외상이 없어서 활기차 보였겠지 죽은 후에도 춤을 추는 동영상 속의 인물처럼
나는 공포를 느끼기 전에 이미 공포에 포섭되어 있었다 넌 내가 사랑해서 그렇게 얌전하구나 말하며 당신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 운석을 생각했다 이 변방의 거대한 충돌을 생각했다 살이 뜯긴 자리에서 살이 생겨나는 게 살아있다는 통각이라면 뜯겨 나간 살에서 살이 자라나는 것은
죽어서도 당신을 증오하겠다는 의지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창밖으로 조명처럼 언덕이 불타고 있고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비뚤게 눌러쓴 토그 브란슈를 다잡는 당신의 손짓과
데스 휘슬을 불며 나의 지옥으로 입장하는 악마들이 있다
드디어 나의 지옥에도 비교할 수 있는 고통이 생겼는데
이 지옥에는 열쇠가 없다
―「변방의 요리사」, 전문
「쌍두사」를 비롯하여 이어서 살펴볼 「미래의 종」, 그리고 인용한 「변방의 요리사」라는 이기현 시인의 작품들은 모두 너와 나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는데, 그 양상이 불협화음과 같이 불편하고 파괴적이며 공포스러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시에서는 당신과 나의 관계의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며 공포스러운 상황이 “데스 휘슬”과 “시스투스”라는 사물들이 환기하는 이미지를 통해서 구체화되고 있다.
‘데스 휘슬’이라는 ‘죽음의 호루라기’는 고대 아즈텍 사원에서 발견된 것인데, 적의 해골에 구멍을 뚫어 만든 피리로 세상에서 가장 기분 나쁜 소리를 낸다고 해서 ‘죽음의 소리’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공포심을 부추기는 음색을 가지고 있어 악마의 소리라고도 하는 데스 휘슬은 전쟁시에 상대방의 기세를 꺾고 두려움에 떨게 함으로써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사용했거나 죽은 사람을 기리는 망자의 날 등의 특별한 죽음의 의식에 사용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데스 휘슬은 그것에 얽힌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 자체가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도록 괴기스러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이미지가 당신과 나의 관계를 암시하는 상관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충격적이다.
‘시스투스’라는 식물은 ‘자살꽃’이라는 수식어를 지니고 있는데, 실제로 자기 자손을 위해서 자살을 택하는 꽃이라고 한다. 즉 시스투스라는 식물는 스스로 온도를 높여서 태워지고 그 과정에서 주변의 잡초들까지 함께 불타게 되는데, 남겨진 씨앗들이 타버린 폐허 속에서 보다 넓은 영역을 확보하고 이를 영양분 삼아서 자라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자손의 번성만을 위해서 주위를 모두 태워 없애버리는 꽃이라는 점에서 시스투스는 이기적인 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시스투스가 당신과 나의 관계를 대변해주고 있는 셈이다.
데스 휘슬과 시스투스의 발화 외에도 이 시에는 당신과 나의 관계를 표상하는 이미지로서 폭음과 광기, 그리고 “식칼”로 대변되는 잔인한 요리사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시적 주체의 불안은 음주와 도취를 야기하고, 그 불안의 근저에는 “식기 깨지는 소리”라든가 “식칼을 쥔 채 나를 노려보는 그림자”라는 요리사의 이미지가 놓여 있는 것이다. 시적 주체는 이처럼 파국적인 당신과 나의 관계를 “지옥”이라고 명명하고, “나는 공포를 느끼기 전에 이미 공포에 포섭되어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죽어서도 당신을 증오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그리고 증오와 복수, 저주의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살이 뜯긴 자리에서 살이 생겨나는” 현상이라든가 “뜯겨 나간 살에서 살이 자라나는” 이미지를 제시하기도 한다. 한편의 시 작품이 악몽과도 같이 불편하고 공포스럽지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한 이미지라든가 시적 공간으로 끌고 온 다양한 시적 제재들이 주는 이국적이고도 기괴한 분위기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역시 너와 나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다음 작품은 어떨까?
생물이 되어가고 있어
반성을 아는
같이 살래?
물어오면 포장지처럼 매끈해지던 얼굴
감싸고 싶어서 건기의 그늘을 닮기로 했지
그게 욕심이었을까
습기처럼 달라붙는 반성이
미래를 연습하는 방식이 되었어
스크린 도어에 비친 너와 추돌했던
열차는 네게 어떤 미래를 전달해 주었니
홀로 종점의 개찰구를 나오면서
발을 벗으면 맨발이 되고
얼굴을 벗으면 민낯은
파도가 멈춘 바다처럼 조용했는데
그날이 기념일과 같아서 나는
낡은 기억도 선물이 될까 해서
손이 손을 놓쳐서 생긴 손으로
시든 꽃다발 들고 미래에 도착해 있어
너는 자주 넘어지던 사람
내가 물건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으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헤엄치듯 다가오던 너는
바닥 속으로 들어가 해묵은 기억들을
보물처럼 건져 바닥 위로 널브러뜨렸지
거기서 바다 냄새가 나서
그중 하나를 집어
오래 슬픔을 솎아내다 보면
어엿한 추억이 되어 반짝이곤 했는데
같이 살 수 있을까?
되물으면 대답 대신 너는
알몸을 벗고
물에 가까워졌고
이제 나는 너의 몸짓까지 잊어야 했던
네가 전달 받은 미래의
스크린 도어 안으로 들어와 있어
너의 투명성을 믿으려고
여기, 반쯤 투명해진
어느 종의
아주 긴 반성이 있어
―「미래의 종」, 전문
너와 나의 관계라는 시적 주제가 “미래”라는 시간성, 그리고 “종”이라는 집단성이 도입됨으로서 공상과학영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생물이 되어가고 있어/ 반성을 아는”이라는 시의 첫 구절 역시 진화론적 배경을 토대로 해서 미래의 종의 운명에 대해서 발언하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시적 공간을 새롭게 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너와 나의 관계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암울하며 비극적이다.
시적 주체가 토로하는 “같이 살래?”라는 질문이라든가 “같이 살 수 있을까?”라는 반문이 되풀이 되는 것 자체가 둘의 관계가 함께 할 수 없으며 곧 파국에 이를 것이라는 불안감과 의구심을 내포하고 있다. “스크린 도어에 비친 너와 추돌했던/ 열차”라든가 “네가 전달 받은 미래의/ 스크린 도어 안으로 들어와 있어”라는 표현들은 “투명성”이라든가 “미래”라는 함축적 의미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는데, 이처럼 반복해서 등장하는 “스크린 도어”의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불투명한 미래와 헤아리기 어려운 ‘너’의 내면 심리를 투영하고 있다.
시적 주체가 너의 “포장지처럼 매끈해지던 얼굴”을 환기하기도 하고, 그와 대립적인 이미지인 “맨발”이라든가 “민낯”, 그리고 “알몸” 등을 강조하는 것은 가면을 벗은 진정한 너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하는 내면적 열망을 암시해준다. 또한 선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낡은 기억”이라든가 보물처럼 건져 올린 “해묵은 기억들”, 그리고 반짝이는 “어엿한 추억들”을 자꾸만 강조하는 것은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적 주체의 전략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시적 구도는 결국 너와 나의 관계가 가면에 의해서 가려진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양상을 지녔기 때문에 너와 나의 관계라는 것이 결국은 미래에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시적 주체의 불안과 의구심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과 의심의 내면적 심리는 “너의 투명성을 믿으려고/ 여기, 반쯤 투명해진/ 어느 종의/ 아주 긴 반성이 있어”라는 시적 결말로 집약되는데, 이러한 표현들은 불안과 의심으로 점철된 인간관계를 개체적 차원에서 종적인 차원으로, 그리고 한 순간의 시간에서 생물학적 진화의 시간으로 확장함으로써 인간관계에 내재된 비극적이고 비관적인 양상을 전면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평범한 것을 거부하는 이기현 시인의 시적 발상은 독자들을 기이하고 괴상한 공간으로 초대하여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을 음미하도록 한다.
4. 개성의 독자성을 위하여
비인간적인 시선을 도입을 통해서 시적 공간을 갱신하고 있는 오석화 시인, 차분하고 냉철한 어조로 현대사회의 비정한 국면을 그 내부에서 들여다보면서 정교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조은영 시인, 그리고 악몽과도 같은 너와 나의 관계에 몰입하면서 기괴하고 이국적인 시적 대상들을 도입하여 시적 공간을 잔혹극의 그것처럼 극화시키고 있는 이기현 시인의 개성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들의 새로운 목소리는 신선하고 참신하며, 기존의 시적 문법을 갱신하고 새로운 시적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에너지로 충만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시적 개성을 얼마나 집요하게 파고들고 밀고 나갈 수 있는지 하는 끈기의 문제일 것이다. 물론 시인은 항상 매너리즘을 경계하고 아방가르드의 정신으로 전위를 고수해야 하지만, 그것은 어떤 한 세계를 이룬 다음의 문제일 것이다. 개성적인 시인들의 탄생을 반기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개성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할 것을 기대해 본다.
*자료 제공 _ 계간 《열린시학》
개성적 작시술의 향연 < 젊은 시인의 시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오석화 시인 조은영 시인 이기현 시인 편 (1)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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