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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의 시선〉 특집 _ 김지민 시인 강우근 시인 편 _ 작품론 _ 황치복 평론가

오피니언

by 미디어시인 2025. 2. 7.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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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론>

 

 

 

현실의 발견, 혹은 삶의 신비로움

김지민, 강우근의 새로운 시선

 

 

황치복

 

 

1. 삶의 비관적 전망과 아이러니(irony)

 

이번에 살펴보게 될 김지민, 강우근 시인의 시편들에서 인생과 현실에 대한 사유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신인들은 인생이나 현실, 혹은 사회와 문명에 대한 사유보다는 놀이와 유희, 혹은 게임과 환상과 같은 비현실, 혹은 현실 너머의 현상에 주목하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 반가운 것은 신인들이 바라보는 인생과 현실의 모습들의 모두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관점에 의해서 포착되고 있기 때문에 경이로움을 선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지민 시인은 라비린토스의 미궁과도 같은 인생의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국면에 초점을 두면서도 비관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서 독특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고, 강우근 시인은 인간관계의 복잡하고 미묘한 국면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역시 비관적인 관점으로 이를 조명함으로써 개성적인 시적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두 시인은 모두 인생과 현실을 관심의 초점으로 등장시켜 시적 사유를 전개하면서 독특한 발상과 상상력을 통해서 독자적인 시적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특히 인생과 현실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이면서도 비판적인 관점을 취함으로써 짙은 페이소스를 형성함하고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이들의 비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은 인생과 현실에 대한 깊은 사유가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페시미즘적인 시각이 전혀 퇴폐적이거나 퇴행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매력적인 시인들의 새로운 시선으로 들어가 보자.

 

김지민 시인은 2020현대문학을 통해서 문단에 등장했는데, 삶과 인생에 대한 차분하고 그윽한 시선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 새롭게 발표한 나이스 뷰를 비롯하여 서약, 미로연습등의 작품들은 시인의 섬세한 관찰력과 함께 독특한 상상력이 시인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데, 무엇보다 들뜨지 않고 인생의 특정한 국면에 대해서 치밀하게 파고들어 분석하는 날카로운 시적 사유가 빛을 발하고 있다. 나이스 뷰와 같은 작품은 다소 시니컬한 어조를 취하면서도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으로 해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사물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간격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와 백사장의 간격”, 혹은 한시도 손을 잡지 않고 백사장을 걸어가는 연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 그리고 쉬고 싶어 희고 차가운 이불 속으로 파고들기만 하는 옆 사람과 시적 화자 사이의 간격, 그리고 강화유리창을 사이로 보이는 이쪽의 시적 화자와 저쪽 백사장 사람들과의 간격, 또는 여기까지야 더 넘어오지 마라는 메시지처럼 누군가 죽 그어놓은 수평선의 이쪽과 저쪽의 간격 등 수많은 간격이 등장한다. 이러한 간격을 사이로 사물과 사물, 인간과 인간들은 서로 합일하거나 교감하지 못하고 소외(alienation)를 경험하고 있다. 시인을 이러한 풍경에 대해서 나이스 뷰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있는데, 시적 내용과 제목 사이에서 반어(irony)의 번뜩임이 빛나고 있다. 시인의 비관적인 세계 인식은 다음 시에서도 매우 도발적으로 진행된다.

 

내 눈을 감겨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몇 사람이 일어서고 몇 사람이 돌아온다.

하객을 등지고 선 두 사람은 바다를 향해 놓여 있는 신발 한 켤레 같다. 도저히 다음 장면이 그려지지 않는다.

 

희고 납작한 돌 하나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지나간다.

 

돌은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집을 짓듯이 두 사람을 공중에 걸어놓듯이 영원히 곤두박질치지 않을 듯이 느릿느릿 지나가고 하객들은 눈으로 돌을 쫓는다.

두 사람이 볼 수 없는 희고 납작한 돌을.

 

슬퍼 보여요

 

두 사람은 손을 맞잡는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히고 풀어지고 또 서로 바짝 끌어당기는 동안

하객들은 여전히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지나는 돌을 본다.

 

앞사람의 뒤통수에서 발견한 흰 머리카락처럼 슬픈 예감이 하객들 사이에 머무르고

예식장 맨 뒤에 서서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돌아선다.

하객들은 붉은 손바닥을 흔들며 두 사람을 배웅한다.

 

돌아오지 마세요.

돌아오지 마세요.

 

그러나 떨어질 것이다.

 

*내 눈을 감겨주세요, 기도시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서약, 전문

 

시적 맥락에서 보면 제목인 서약은 부부의 연을 맺은 배우자들이 평생 상대방을 향해서 의무와 사랑을 다하겠다는 혼인서약을 의미할 것이다. 젊은 남녀가 부부의 연을 맺고, 평생을 함께 반려자로서 함께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담은 혼인서약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데, 그만큼 신성하고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그러한 맹세가 굳고 단단해서 결코 변하지 않고 평생을 가기를 바라는데, 이러한 혼인서약에 대한 일반적 믿음과 희망이 이 시에서는 희고 납작한 돌에 응축되어 있다. 신랑과 신부로 추측되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그 희고 납작한 돌은 물론 환상의 산물이지만, 두 사람의 믿음과 하객들의 소망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환상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돌은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집을 짓듯이 두 사람을 공중에 걸어놓듯이 영원히 곤두박질치지 않을 듯이 느릿느릿 지나가고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러한 시적 묘사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는 한자 성어를 연상시키며 불안하게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안감과 슬픔의 정감을 자아내는 맹세의 돌은 두 사람은 바다를 향해 놓여 있는 신발 한 켤레 같다든가 앞사람의 뒤통수에서 발견한 흰 머리카락처럼 슬픈 예감이 하객들 사이에 머무른다는 묘사 등과 결합하여 그 불안하고 불길한 징후를 예각화한다. 또한 불쑥 갑자기 튀어나온 슬퍼보여요라는 독백이라든가 예식장 맨 뒤에 서서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사람이 있다.”는 표현 등이 결합하여 왠지 이 결혼과 서약은 불행한 결말에 이를 것 같다는 예감을 농후하게 한다.

결국 이 맹세의 돌은 공중에 떠 있다는 점에서 중력에 법칙에 의해서 떨어질 것인데, “그러나 떨어질 것이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그러한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러한 시적 결말은 역시 서약이라는 제목을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이끈다. 절대 변치 않고 영원히 사랑할 것을 다짐하는 맹세란 사실은 매우 취약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처럼 허약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미래를 예감하기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것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맹세의 허약하면서도 간절한 성격은 희고 납작한 돌이라는 이미지 속에 응축되어 있다. 다음 작품도 삶의 비애와 아이러니로 넘쳐나고 있다.

 

입구에서 시작하면 풀 수 없는 미로

출구에서 시작하면 풀 수 있다

들어서는 것과 돌이키는 것은 그렇게 다르고

 

점점 망설이는 의태어가 되어간다

이제껏 성큼성큼 망해왔으므로

 

끝에서부터 시작하고 싶다

연월일시 받아 적다

다 알아버려서 돌려보내는 점쟁이처럼

 

구겨진 종이와 누군가의 대뇌피질 같은

미로 속

내 모든 실패의 동선

한 눈에 내려 보고 싶다

 

멈춰야 한다고

돌아오는 길 내내 비참할 것이라고

 

예언은 언제나 정확해서 가소로운 것이었지만,

 

뒤에서부터 완성한 그림이 환해보이는 날들이 있었다

 

죽을 날을 미리 받아본 사람의

흉내 낼 수 없는 결연함

 

통성명도 없이 나란히 누운 남녀의

둘도 없는 막역함

 

끝에서부터 몰아본 드라마 속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서먹해지고

알았던 것을 모르게 되고

잦아들고

감추어져

한치 앞을 모르는 얼굴이 되어가는 풍경

 

만류하고 싶다,

―「미로연습, 부분

 

삶의 비관적인 성격은 이제껏 성큼성큼 망해왔으므로라는 구절이라든가 내 모든 실패의 동선이라는 구절 속에 압축되어 있다. 삶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실패하고 망가지는 비관적인 전망 속에 있다는 것, 그래서 삶이란 점점 망설여지는 의태어처럼 주저와 망설임 속에서 어떤 액션도 취하기 어렵다는 것 등의 삶에 대한 페시미즘적인 관점이 드러나 있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실패의 행로로 점철된 인생의 역정에 대해서 한 눈에 내려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러한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영화에서처럼 삶의 행로를 끝에서부터 시작해보기를 원한다. 물론 그러한 작업은 상상 속에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결과는 놀라운 효과를 산출한다.

입구에서 시작하면 풀 수 없는 미로출구에서 시작하면 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뒤에서부터 완성한 그림이 환해보이는 날들이 있기도 한 것이다. 결과를 미리 알기에 실패의 원인과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그려지고, 그래서 시적 화자는 실패와 좌절의 전모를 파악하게 되며, 그리하여 시적 화자는 실패라는 인생의 한 국면을 장악하게 되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럴 때 예언은 언제나 정확해서 가소로운 것이 될 수 있고, “다 알아버려서 돌려보내는 점잼이의 입장이 되어서 사태를 압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한 테세우스가 실을 풀어가면서 들어갔다가 그것을 다시 돌이키며 입구로 나오는 것처럼 구겨진 종이와 누군가의 대뇌피질 같은라비린토스와 같은 미로를 헤쳐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출구에서 시작하는 삶의 행로는 죽을 날을 미리 받아본 사람의/ 흉내 낼 수 없는 결연함을 지닐 수 있도록 하기도 하지만, “통성명도 없이 나란히 누운 남녀의/ 둘도 없는 막역함이 가능하도록 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입구에서 출구로 나아가는 삶은 결코 경험할 수 없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과 경이로움을 선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출구에서 시작하는 삶의 행로는 끝에서부터 몰아본 드라마 속에서처럼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서먹해지고/ 알았던 것을 모르게 되, “한치 앞을 모르는 얼굴이 되어가는 풍경과 같은 낯설지만 신선하고, 놀랍고도 생동감 있는 경험을 산출하기도 한다.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장악하고 싶다는 욕망이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삶의 행로로 이끌고 그것은 다시금 놀라운 생동감으로 이끄는 삶의 신비와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발한 상상력과 반어가 삶의 실패와 그에 따른 비관적 전망을 커버하면서 경이로운 삶의 국면들을 창출하는 것이 김지민 시인의 시적 비전인지도 모른다.

 

 

2. 자연현상, 삶과 관계의 알레고리

 

강우근 시인은 2021<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는데,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대해서 천착하면서 비관적인 관점으로 그것을 시화하고 있는데, 그러한 작업을 통해서 삶의 신비로움과 관계의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성적인 시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우산을 어느 손으로 쥐어야 하나라는 신작에서 이불 안으로 손을 넣어야 할지, 바깥으로 빼야 할지/ 창문을 닫고 자야 할지, 열고 자야 할지/ 깜박 잠에 들면 또다시 더워서, 추워서 깨어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삶이란 시시콜콜한 선택의 과정이며 망설임

의 연속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망설임은 어느 날 비가 되어 쏟아지는데, 쏟아지는 비는 다시금 우산을 불러오고, 우산은 우산을 나란히 썼던 사람이 뭉게구름처럼 사라졌다는 것을환기시켜 준다. 그러니까 삶은 사소한 선택과 망설임의 연속이며, 그러한 연속은 상실과 좌절로 점철되어 있는 셈이다. 다음 작품 역시 유사한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비가 내리자 그는 현관에 잠들어 있는 새를 집어 바깥을 나선다. 한동안 고요하고 투명했던 새가 그의 머리 위로 펼쳐진다. 거리에는 그의 새뿐만 아니라 검고, 파랗고, 노란 새들이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있다. 투명한 새로 그는 하늘을 보고 있지만, 새는 언제든지 바람을 타고 날아가려고 한다. 바람이 불어 날개가 흔들릴 때마다 새는 그가 자신의 긴 꼬리를 놔버리기를 바란다.

새를 끌고 나온 사람들은 새의 중심을 감당해야 한다. 모든 바람 안에서 새는 스스로의 첫 숨을 가지려고 한다. 날개가 펼쳐진 온 세상의 새들이 횡단보도에서 교차할 때, 그가 시계를 보면서 문득 거리를 멈출 때, 그는 투명한 새를 놓친다. 검고, 파랗고, 노란 새가 연달아 날아간다.

젖어가는 그는 새가 희뿌연 하늘과 같은 색이 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사람들이 뛰어갈수록 멀어져가는 새들. 새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든다, 가방을 머리 위로 올리고 거리에서 작아져 간다. 사방에서 내리는 비가 사람들을 상영한다.

그는 2층 카페에 들어가서 뜨거운 커피를 시킨다. 창 바깥에는 여전히 수많은 새를 붙잡으며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나뭇가지 위에 앉은 작고 노란 새를 넋 놓고 본다. 그녀는 비가 많이 와서 늦었다고 말한다. 그녀의 외투는 그와 같이 흠뻑 젖어 있다. 그녀는 검은 새를 놓쳤다고 한다. 검은 새는 아주 크고 긴 꼬리를 가졌다고 한다. 검은 새가 그렇게 잘 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고 한다. 젖는지도 모르고 시야에서 검은 새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렇게 잠시 검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거리에는 새의 날개를 펼치고 접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거리 곳곳에서 새의 꼬리가 파르륵 떨린다. 아이들은 하늘로 완전히 떠나버린 새들처럼 비를 맞으며 뛰어다닌다. 그들은 실내의 새와 같이 한동안 카페에 묶여 있다.

―「우산들, 전문

 

우산을 어느 손으로 쥐어야 하나라는 시에서처럼 역시 이 시에서도 우산이 등장하고 있다. 또 다른 신작이 태풍 같은 사람이 온다면이라는 제목인 것을 보면 강우근 시인은 계절이라든가 날씨와 같은 자연적 현상에 관심이 많은 듯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인간관계에 대한 어떤 속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통적 서정시와 확연히 달라지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계절이나 날씨는 단순히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어떤 삶의 한 국면이나 인간관계의 특정한 양상을 은유하는 비유이거나 매개물인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우산들은 다양한 새들이 그 매제로 설정되어 있는 은유이다.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우산들은 투명한 새를 비롯하여 검고, 파랗고, 노란 새들로 비유되고 있으며, 우산들은 한 마리의 새들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바람을 타고 날아가려고 하거나 바람이 불어 날개가 흔들릴 때마다” “그가 자신의 긴 꼬리를 놔버리기를 바라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현관에 잠들어 있다가 비가 내리면 깨어나는 이러한 새들은 왜 모두 그것의 포획자들로부터 벗어나 날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본래 그늘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에서 유래한 우산(umbrella)은 사람을 보호하는 천장을 의미하기도 했고, ()을 상징하기도 했다고 한다. 현관에 잠들어 있다 비만 오면 그것의 소유자와 동행하는 우산은 단순한 우산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떨어지는 비를 막아주기도 하지만, 언제나 기회만 있으면 달아나려 한다는 점에서 어떤 인간의 본성이나 속성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나에게 속해 있지만, 평소에는 잠들어 있다가 비만 오면 동행이 되는 나의 분신, 그렇지만 언제나 자기를 놓아줄 것을 요구하며 기회만 되면 떠나려고 하는 새와 같은 본성을 가진 인간의 어떤 속성을 그것은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그 새들을 놓친다. “그가 시계를 보면서 문득 거리를 멈출 때, 그는 투명한 새를 놓치, “검고, 파랗고, 노란 새가 연달아 날아가, “그녀는 검은 새를 놓쳤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새들을 놓친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경험들에 직면한다. “사방에서 내리는 비가 사람들을 상영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비에 의해서 스크린에 비춰지듯이 존재하게 되고, “아이들은 하늘로 완전히 떠나버린 새들처럼 비를 맞으며 뛰어다닌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어떤 자연스러움과 천진함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니까 우산은 비와 함께 살아나는 인간의 어떤 본성을 암시하면서도 또한 그것은 사람들을 떠나서 저 자유로운 공간으로 날아가고 싶은 어떤 내면의 속성을 시사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 작품에 등장하는 태풍도 단순한 자연현상에 머물지는 않는다.

 

꿈속으로 찾아온

영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흔들리는 마음이 있어

 

노란 지붕과 파란 지붕은 닿을 수 없지만

노란 지붕에 사는 사람과 파란 지붕에 사는 사람이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

 

동시에 바깥을 보는 장면처럼

태풍은 오고야 말지

 

우리는 태풍 때문에 얼굴을 못 보고, 운행이 중지된 버스에 타지 못하고, 닫힌 상가를 들어갈 수 없겠지만

 

작았던 마음이 이렇게 거대해진

태풍의 심정은 어떨까 이름을 가지는 순간부터 사라질 일밖에 없는

 

바다의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열대지역의 나무의 이름을 가진, 해가 질 때의 풍경의 이름을 가진 태풍이 지나가고 있어

 

지금 누가 이렇게 옥상의 빨래를 흔드는 걸까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준 것은 무서움 때문일까,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일까

 

붙잡히지 않으려면 우리도 몸을 함께 흔들어야 할까 우리는 모두 창문을 걸쇠로 잠가놓았지만

 

길 한복판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이 있어 어떤 비는 슬픔을 흘려보내지 못해 그 슬픔을 헤매는 사람으로 남겨 놓는다

 

또 한 번 우리는 태풍을 견뎠다고 말하겠지만

 

옥상에서 빨래 몇 벌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모르듯이, 멍든 문짝을 버리고 새로운 문을 달듯이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들 중 누군가는 영영 보이지 않는다

―「태풍 같은 사람이 온다면, 전문

 

태풍이란 사실 뚜렷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강력한 열대성 저기압을 통칭하는 것이다. 그것은 강력한 바람과 엄청난 비를 품고 있으며, 그래서 재난과 재앙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더운 수증기를 공급받지 못하면 소멸에 이른다. 그것은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이름을 가진 순간부터 사라질 일밖에 없는그런 존재인 셈이다. 그런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태풍은 자연 현상으로서의 단순한 태풍이 아니라 어떤 인간의 성격이라든가 혹은 관계의 성향을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목은 시적 대상이 태풍과 같은 사람이 온다면 그 결과와 효과는 어떠할지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풍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면서 다가오며, “사람이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도록 하면서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은 다가와 얼굴을 못 보게 하고, 버스의 운행을 중지시켜 그것을 타지 못하게 하고, 상가를 닫히게 하여 거기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한다. 그러니까 태풍은 충격과 파장을 몰고 오면서 다가와 사람들에게 어떤 불가항력적인 효과를 산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바다의 신이라든가 열대지역의 나무의 이름”, 혹은 해가 질 때의 풍경의 이름을 부여하지만, 그러한 명명 행위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스러운 대상을 장악하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풍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한 인간이 태풍과 같은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고 헤어지는 과정으로 이해해 보면, 그러한 과정은 파토스가 넘쳐흐르는 폭발적이고 극적인 것이 된다. 먼저 태풍은 오고야 말지라는 구절은 태풍과 같은 인연이 불가항력적이고 운명적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이름을 가진 순간부터 사라질 일밖에 없는이라는 표현은 또한 그러한 불같은 관계가 운명처럼 파국을 예비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처럼 운명처럼 다가와서 필연으로 사라지는 태풍과 같은 사람은 지금 누가 이렇게 옥상의 빨래를 흔드는 걸까라는 구절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온 존재를 흔들어 놓고 온갖 감각과 정동을 향수하도록 한다. “바다의 신이라든가 열대지역의 나무 이름”, 그리고 해가 질 때의 풍경등의 표현들은 태풍 같은 사람이 다가왔다가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그 과정을 선명한 이미지로 표상해준다. 그러한 사람과의 관계는 무섭기도 하지만 오래 기억하고 싶기도 하는 역설적인 것이기도 한데,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세계가 이전과 같을 수 없듯이 태풍과 같은 그런 사람과 그러한 관계를 경험한 사람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인격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우근 시인은 자연 현상을 통해서 인간의 삶과 인간관계의 오묘하고 불가사의한 국면으로 파고들어 그것의 신비를 캐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시적 개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새롭게 조명해 본 김지민, 강우근의 새로운 시선들은 매우 독창적이며 개성적이며 매력적이다. 비관적 전망으로 삶을 곤경과 신비를 탐색하는 김지민의 시선은 차분한 어조와 기발한 발상, 그리고 번뜩이는 위트가 돋보인다. 강우근 시인은 날씨와 자연현상을 알레고리로 활용하면서 현대인의 삶과 인간관계의 복잡한 국면을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개성적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시인 모두 안정적인 시각과 차분한 어조로 현대인의 삶과 사회, 그리고 문명의 본질에 육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시적 행보를 기대하게 한다. 좀더 치열하고 전투적인 태도로 삶과 사회에 대해서 파고들어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 줄 것을 기대해 본다.

 

 

*자료 제공: 계간 열린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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