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의 방식
이병철
노을을 펼치기 위해 구름 뒤편에선 투견판이 벌어진다 그 거룩한 링에는 미움이 없다 핏방울은 사랑스럽게 튀어 오르고 꽃 같은 싸움, 물감으로 흉내 낼 수 없는 붉음
태양을 찢은 건 구름이 숨긴 이빨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역광을 날아가는 새들이 실은 하늘의 상처를 꿰맨 자국이라니
싸움개의 전생은 수상좌대에 낚시를 펴고 물고기나 낚아 올리던 한량인지 모른다 철창 세운 겨울나무들에 갇혀 피 흘리는 건 전생에 대한 형벌, 송곳니 박힌 곳에서 노을은 태어나고
한 생애가 맹랑하게 덤벼들었다가 피 쏟고 축 늘어질 때, 울지 마라 싸움에서 진 개들이 시커먼 어둠으로 우러나더라도
그대와 나는 철창 안에 마주 선 두 마리 개였을까 내 더러움 속에 깃든 한때의 촛불에 그대 언 손 따뜻했었나 나는 그대 어깨에 날개 문신 새겨준 것 후회하지 않는다
그대가 낯선 몸을 열어 둥근 이마를 빛내고 검붉은 얼룩으로 앞강 적실 때, 그대가 서 있는 곳의 노을을 나에게 방류해주길
나는 투견처럼 상처입고 단단하므로
노을은 내 세계를 에워싸는 어제의 명암이므로
― ≪시와 표현≫ 201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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