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반으로 펼치면
김영
두꺼운 책 한 권을
딱 반으로 펼쳐놓으면
꽤 넓은 들판이 생기고 지평선이 보인다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는 사이
작은 냇물이 졸졸 흐른다
그 위에 양 떼를 풀어놓아도 좋고
몇 채의 집을 짓고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짓듯,
울타리를 세우면 좋겠다
울타리의 용도는 옛날에도 망설였고
지금도 망설이는 일이지만
넘어오는 것과 넘어가는 것 중
어느 것을 말리는 일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딱 반으로 펼친 책장에서는 여차하면
다시 접어버리면 되는 일
그러고 보니 움푹한 구릉지대나
큰 강이 흐르는 곳들은
허공이 딱 반으로 접힌 곳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반으로 접힌 책
그쯤 읽으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시시비비도 대충 가려질만 하겠다
딱 반이라는 곳들은 힘이 세다
양쪽으로 나누어 주고도 남는 힘으로
양쪽을 붙잡아 둘 수 있다
책은 그 힘으로 내용을 지탱하고
등장인물들을 끌고 가고
결말을 끝장에 둘 수 있는 것이다
두꺼운 책일수록
더 많은 양쪽을 반으로 갖고 있다
나라는 책, 한쪽이 너무 두꺼워졌다
— 《현대시》 202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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