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여성민 시인이 9년 만의 신작 시집 『이별의 수비수들』(문학동네, 2024)로 독자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첫 시집 『에로틱한 찰리』(문학동네, 2015)를 통해 “분명하게 대상을 지시하고 그것에 대해 뚜렷하게 말하며” 대상의 본질을 특별한 시선으로 명징하게 형상화하는 능력을 보여준 바가 있다. 반복과 변주를 통해 섬세하게, 견고하게 시의 ‘건축술’을 보여준 것도 매력적인 요소로 평가되었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이별의 수비수들』의 주축이 되는 모티브 중 하나는 이별이다. 이별은 사랑이 동반된 후에 나타난 현상이므로, 그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대부분 “사랑으로 약해진” “이별의 수비수들”(「나의 아름다운 사회주의」)이다. 사랑의 수호자 대신 이별의 수비수가 되기를 자처하는 화자는 힘을 빼는 방식으로 슬픔과 애증으로 점철된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는 심리적 양상을 드러낸다. 그에게 이별은 시를 쓰게 만드는 ‘좋은 씨앗’(시인의 말)이다. 그러니 이별을 잘 가꾸기 위해서는 사랑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이별을 단순화시키지 않고 이별이 갖는 속성을 개별적으로 바라보고 내밀하게, 섬세하게 시적으로 탐구한다.
이번 시집은 총 53부의 시를 4부로 나누어 엮었다. 앞선 3부의 제목은 각각 ‘숙희’ ‘선희’ ‘경희’이다. 첫 번째 시집 『에로틱한 찰리』에서 각 부마다 ‘보라색 톰’ ‘에로틱한 찰리’ ‘모호한 스티븐’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과 대조적이다. ‘톰’ ‘찰리’ ‘스티븐’이 외국인 남성의 이름이라면, ‘숙희’ ‘선희’ ‘경희’는 한국인 여성의 이름이다. 사랑과 이별은 모든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는 일이란 점에서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소재이며, 동시에 한 인간을 관통한다는 점에서 유일하고 개별적인 경험이다. 시인은 살면서 한 번쯤 사랑하거나 이별했을 법한 이름들을 통해 그러한 이별의 순간을 고유한 이름으로 호명한다. 제삼자에게는 비슷비슷한 사랑과 이별일지언정, 오롯이 나에게 속한 환희와 슬픔을, 언어로 규명할 수 없는 그 찰나를 ‘숙희’ ‘선희’ ‘경희’와 같은 이름으로 불러보는 셈이다.
여성민은 문학동네 출판사와의 미니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시인은 이별하는 사람이에요. 생활과 이별하고 직업과 이별하고 요점과 이별하는 사람. 한 편의 시를 위해 이 세상의 감각과 이별하고 상징과 이별하고 자신의 낡은 언어와 이별하는 사람. 그래서 “시인은 이별을 쓰는 사람입니다”(「애인과 시인과 경찰」)
여성민에게 이별은 일상이고 증상이다. 그는 어쩌면 흔한 이별을 흔하지 않게 만들어서 이별한 사람과 이별할 사람을 위로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여성민이 『이별의 수비수들』을 통해 우리에게 던진 매혹적인 이별의 문양은 여성민만의 고유의 것인 동시에 우리들 자신의 것이 되는 셈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숙희
여성민
이별한 후에는 뭘 할까 두부를 먹을까 숙희가 말했다
내 방에서 잤고 우리는 많이 사랑했다 신비로움에 대해 말해 봐 신비로워서 만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숙희는 말했다
눈이 내렸을까 모르겠다 신비로워서 만질 수 없는 것을 나는 모른다 두부 속에 눈이 멈춘 풍경이 있다고 두부 한 모에 예배당이 하나라고
사랑하면 두부 속에 있는 느낌이야 집에 두부가 없는 아침에 우리는 이별했다
숙희도 두부를 먹었을까 나는 두부를 먹었다
몸 깊은 곳으로
소복소복 무너지는
이별은 다 두부 같은 이별이었다 예배당 종소리 들으려고
멈춘 풍경이 많았던
사람이 죽을 때
눈이 몰려가느라 몸이 하얗다면
죽어서도 두부 속을 걷는 사랑이라면
눈이 가득한 사람아 눈이 멈춘 눈사람 예배당 종소리 퍼지는 지극히 아름다운 눈사람아 그러나 만질 수 없는 것을 나는 모르고
두부는 생으로 썰어 볶은 김치와 먹어도 좋고
된장 조금 풀어서
끓여내는 이별
―『이별의 수비수들』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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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사회주의
여성민
사랑이 끝난다 퇴근해야지, 저녁은
흘러내린 머리카락
약간의 빛처럼, 이라고 쓴다 빛이 남은 곳에 앉아
빛은 어떤 노동자일까
아침에 일하러 가고 저녁에 약해지는
나의 약한 노동자여 하고 빛이 줄어든 쪽으로 돌아앉은 것이다 잘 자요 빛의 아내여 노동자의 아내에게도 담요를 흘러내린 머리카락 올려주다가
사랑을 쓸어 올리는 사람 있을 것이라고
사랑으로 약해진 사람들 이별의 수비수들 언덕에 모여 하늘이 핏빛이라면
빛이 언덕을 빨아올리는 것이라면
빛은 피의 노동자이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가는 사람 있을 것이다 캄캄한 집에 누워 부드러운 것 찾아먹는 사람 있을 것이다
힘을 빼고
턱의 힘으로만
타인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수 있어서
이별은 부드러운 노동
그리하여 어둠 속에서 내 쪽으로 돌아앉으며 부드러운 노동자여 하고 불러본 것이다
피의 노동자도 되고 약간 연한 노동자도 된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연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국가는 나의 부드러움을 구속할 것이다
―『이별의 수비수들』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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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여성민
사과처럼 나를 한 바퀴 돌아온 사람을 사랑하지 한 모금 연기처럼
입안에 과수원이 생깁니다
나는 두 손으로 연기를 씻어 먹네 사과는 입에 들어올 것처럼 손에 박힐 것처럼 사과를 먹은 날부터 사과들이 못 박혔지 신이시여 이 사과를 내게서 옮기소서 과수원을 파내소서 사실은
사과 밖에서 내가 사과에 박혀 있지 늘어져 아름답지
내 안에 못 박힌 사과와 사과에 달린 나를 생각하다 몸 안으로 가라앉는 담배연기를 생각하다 사과에도 눈 쌓여야지 못 박힌 예수에게도 눈 내려야 아름답지 사실은
내 시를 읽은 사람이 있나봐
그래서 내가 아픈가봐 말한 시인이 있습니다
비빔국수에 못 박을 사과를 씻다 비빔국수 속으로 걸어 들어간 시인이 있습니다 사과 눈 예수 무너지는데 눈밭 사과밭 무너지는 속을 걸어간 아름다운 날 있으니
울지 마
시는 눈깔처럼 쓸게
―『이별의 수비수들』 문학동네, 2024.
이별을 노래한 매혹적인 시의 문양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이별을 노래한 매혹적인 시의 문양 - 미디어 시in
하린 기자 여성민 시인이 9년 만의 신작 시집 『이별의 수비수들』(문학동네, 2024)로 독자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첫 시집 『에로틱한 찰리』(문학동네, 2015)를 통해 “분명하게 대상을 지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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