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이영옥
당신의 뒷모습은 갈수록 아름다워서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편의점 앞에 반쯤 뭉개진 눈사람이 서 있다
털목도리도 모자도 되돌려주고
코도 입도 버리고 눈사람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순수 물질로 분해되기까지
우리는 비로 춤추다가 악취로 웅크렸다
지금은 찌그러진 지구만 한 눈물로 서 있다
눈사람이 사라져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사람이 섰던 곳을 피해 걷는 것
당신을 만들어 나를 부수는 사이
뭉쳤던 가루가 혼자의 가루로 쏟아졌던 사이
사람은 없어지고 사람이 서 있던 자리만 남았다
우리가 평생 흘린 눈물은 얼마나 텅 빈 자리인지
― 『하루는 죽고 하루는 깨어난다』, 걷는사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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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더듬어 생각해보면 뒷모습이 아름다운 건 사랑이 아니다. 다만 애써 만든 눈사람은, 온몸을 다해 마주했던 당신은, 처음부터 비극적 운명이 예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의 자리를 피해 걷는 것이라는 고백은 가엾은 비겁에 가깝다.
시인도 도망치고 싶은 이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눈 감고, 지우고, 피우고 싶은 ‘자리’가 있을 뿐이다. 감히 사랑이라는 건, 눈이 녹아 눈사람 이전으로 돌아갈지라도, 사랑이 사랑 이전으로 돌아가 눈물 자국이 될지라도, 그래서 그 자리가 진흙탕이 될지라도, 차마 피해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말라 죽은 나무처럼 뿌리를 박고, 넋 놓고, 텅 빈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지만. 이 또한 얼마나 아프고 잔인한 말인가.
감히 더듬을 수 없는, 피해 갈 수 없는 마음이 있겠다. 겨울이 지나 어느 따뜻한 날이 온다 하더라도 눈물로 텅 빈 자리의 얼룩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테니. 그렇게 지워지면 사랑은 사랑이 아닐 테니. 아파도 피하진 말기를. 빈자리가 처음부터 사랑의 자리였으니.(김병호 시인)
김병호
2003년 《문화일보》 등단.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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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 시인의 〈어제 읽지 못한 시〉 5 _ 이영옥의 「눈사람」 < 포엠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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