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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 시인의 〈어제 읽지 못한 시〉 5 _ 이영옥의 「눈사람」

포엠포커스

by 미디어시인 2022. 12. 27.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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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이영옥

 

 

당신의 뒷모습은 갈수록 아름다워서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편의점 앞에 반쯤 뭉개진 눈사람이 서 있다

털목도리도 모자도 되돌려주고

코도 입도 버리고 눈사람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순수 물질로 분해되기까지

우리는 비로 춤추다가 악취로 웅크렸다

지금은 찌그러진 지구만 한 눈물로 서 있다

 

눈사람이 사라져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사람이 섰던 곳을 피해 걷는 것

 

당신을 만들어 나를 부수는 사이

뭉쳤던 가루가 혼자의 가루로 쏟아졌던 사이

 

사람은 없어지고 사람이 서 있던 자리만 남았다

우리가 평생 흘린 눈물은 얼마나 텅 빈 자리인지

 

― 『하루는 죽고 하루는 깨어난다, 걷는사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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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더듬어 생각해보면 뒷모습이 아름다운 건 사랑이 아니다. 다만 애써 만든 눈사람은, 온몸을 다해 마주했던 당신은, 처음부터 비극적 운명이 예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사랑의 자리를 피해 걷는 것이라는 고백은 가엾은 비겁에 가깝다.

 

시인도 도망치고 싶은 이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눈 감고, 지우고, 피우고 싶은 자리가 있을 뿐이다. 감히 사랑이라는 건, 눈이 녹아 눈사람 이전으로 돌아갈지라도, 사랑이 사랑 이전으로 돌아가 눈물 자국이 될지라도, 그래서 그 자리가 진흙탕이 될지라도, 차마 피해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말라 죽은 나무처럼 뿌리를 박고, 넋 놓고, 텅 빈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지만. 이 또한 얼마나 아프고 잔인한 말인가.

 

감히 더듬을 수 없는, 피해 갈 수 없는 마음이 있겠다. 겨울이 지나 어느 따뜻한 날이 온다 하더라도 눈물로 텅 빈 자리의 얼룩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테니. 그렇게 지워지면 사랑은 사랑이 아닐 테니. 아파도 피하진 말기를. 빈자리가 처음부터 사랑의 자리였으니.(김병호 시인)

 

 

김병호

 

2003문화일보등단.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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