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시나무
김휼
어느새 지나온 길의 방향을 모두 지워놓았습니다
한 점 그늘의 흔적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이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듯이
차가운 은빛의 계절,
얼음처럼 서 있는 그대여
반짝이는 한때도 가지 끝에서일 뿐
사라지지 않은 그늘이 가슴에 남아 있거든 물어보세요
나뭇잎은 어디를 향하는지
― 『그곳엔 두 개의 달이 있었다』, 한국문연, 2021.
-------------------------------
무거운 짐과 같았던 잎들이 모두 지고 그것들의 그늘마저 지워졌지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가슴 속의 그늘. 누군들 이런 그늘 한 평쯤 없을까. 좀처럼 지울 수 없는 그늘 탓에 그대는 혹은 나는 지금 얼음처럼 서 있는 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나뭇잎은 어디를 향하는지"를 물으라 한다. 하지만 나의 그대는 이것저것 따지지말고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좋겠다. 잎도 지우고, 길도 지우고, 반짝이던 한때의 기억도 지우고, 그냥 그 자리에 치장 없이, 그늘 없이 서 있으면 좋겠다.
그대 가슴의 얼음을 내가 안아 녹일 수 있게, 혹여 녹일 수 없다면 나도 그냥 그대 옆에 얼음으로 서 있게. 가진 것 모두 버리고 그저 한겨울 은사시나무처럼 저 하나로 충분히 빛날 수 있다면 오히려 행복하겠다.(김병호 시인)
김병호
2003년 《문화일보》 등단.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가 있음.
― 좋은 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미디어 시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기영 시인의 〈디카시 향기〉5 _ 아미샤 카트리의 「혼돈」 (0) | 2022.12.26 |
---|---|
하린 시인의 〈감동과 감탄〉 4 _ 정현우의 「면(面)」 (0) | 2022.12.20 |
이기영 시인의 〈디카시 향기〉4 _ 김이듬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 (0) | 2022.12.04 |
하린 시인의 〈감동과 감탄〉 3 _ 박제영의 「못」 (1) | 2022.11.19 |
김병호 시인의 〈어제 읽지 못한 시〉 3 _ 하상만의 「내일」 (0) | 2022.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