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 대해
김용옥
모두 잠든 집안 밤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묵 빛 모서리 진 언저리
이제 안경을 쓰지 않고도 물병을 집어 들고 물컵을 채우고, 갈색 뚜껑을 열어 상비약을 찾고, 쌓여있는 책더미 켜 사이에서 읽다 만 페이지를 찾아내고, 나무탁자에 기댄 오래된 어둠마저도 친근하다
두께도 무게도 덜어내고 가볍디가벼운 바람으로 목이 늘어난 셔츠처럼 느슨하고 편안하게 경계를 넘어간다
―『미술관 점경일지』. 시로여는세상,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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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일이 그리고 시를 쓰는 일이 뭐 그리 대순가, 싶은 요즘이다. 삶이 어느 특별한 지점을 관통하기도 하지만 삶의 매 순간이 그렇진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과장되게 슬퍼하고 외로움을 부풀리는 시들을 보면, 이해는 하나 안쓰럽다는 생각도 든다.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아내야 하는 고역을 충분히 알기 때문이다.
익숙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인의 자세는 “목이 늘어난 셔츠처럼 느슨하고 편안하”다. 익숙함이란 그런 것이다. 거리를 없애고, 두께와 무게를 덜어내고 지극함으로 서로에게 자연스러워지는 것. 시인은 그것을 경계를 넘는 일이라 한다. 어둠 속의 물건을 집어내고, 발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를 알아채는 초능력의 경지가 바로 익숙함의 세계다.
우리는 익숙함을 도태나 낙오로 치부하는,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번쩍거리고 편리한 새것일지라도 내 손길, 내 눈길에 익어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그 시간 동안 스스로도 모르게 공들이게 되는 자세와 마음과 의미가 경계를 지우고 익숙함을 만들어 내게 된다. 지난 10여 년 동안 나의 체형에 맞춰진, 푹 꺼진 소파처럼 오늘은 익숙함의 평화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김병호)
김병호
2003년 《문화일보》 등단.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가 있음.
― 좋은 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미디어 시in
김병호 시인의 〈어제 읽지 못한 시〉 7 _ 김용옥의 「익숙함에 대하여」 < 포엠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김병호 시인의 〈어제 읽지 못한 시〉 7 _ 김용옥의 「익숙함에 대하여」 -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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