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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현 동시집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 문학동네에서 발간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3. 2. 1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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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로 아이를 빚고 닭을 돌보는 눈 밝은 할머니가 있는 집

 

강재남 기자

 

 

날마다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아이들을 응원하면서 그런 아이들을 받아 적는 시인이 있다. 먼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금오산 자락이 보이면 마음부터 놓인다는 시인은 구미에 많이 기대어 삶의 터를 다지고 있는 사람이다. 2016창비어린이동시 부문 신인상과 2017시인동네시 부문 신인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동시집 미지의 아이에 참여하였다. 시집 아는 낱말의 수만큼 밤이 되겠지와 청소년 시집 악몽을 수집하는 아이도 펴냈다. 동시집 외톨이 왕으로 제7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이번에 두 번째 동시집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를 문학동네에서 출간하여 우리 곁으로 왔다.

 

임수현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기원에서 출발한 우주 공간으로의 환상성을 예술적으로 탐색하는 것이다. 첫 번째 동시집에는 작은 존재들이 나누는 수줍은 인사와 누구도 소외되지 않은 다정한 마음이 있다. 이런 마음들이 고요하고 은밀한 파티를 시작하면서 곳곳에 환상성을 뿌리내린다. ‘뭉게뭉게 귀 잘린 구름 토끼이거나, ‘욕조를 타고 가는 고양이통행권이 있어야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외톨이가 되는 나라에는 그야말로 외톨이들 천국이다. 이것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팽팽한 언어를 먼 우주로 날려 보내는 시인의 돋보이는 감각인 것인데, 수직으로 끌어올리는 상상력이 역동적으로 이어진다. 이번 동시집 또한 신비로움에 눈을 뗄 수 없다. 할머니의 비범함은 독 속 뱀의 목소리로, 마당 안 닭의 목소리로, 긴 나뭇가지 팔을 한 눈사람의 목소리로 전해져 어딘가 더 이상하고 아름답다. 아이의 탄생부터 오늘까지, 모든 순간을 아이와 함께했던 눈먼 할머니의 이야기에는 신비로움이 그득하다.

 

이렇게 시인에게 기원은 중요한 화두다. 전작 외톨이 왕에서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곰곰 생각하게 했다면, 이번 동시집에서는 그보다 더 앞선 태초를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눈먼 할머니의 나라 또한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하며 우주의 별 하나, 구름 한 조각까지 구석구석 살펴보게 한다. 이처럼 만물의 기운을 모아 철컥철컥 짜서 마침내 반짝, 한 생명이 완성되니 세상에 태어나는 작고 소중한 것들이 반갑다고 손을 맞잡는 것이다.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세 살 때 눈이 멀게 된 할머니의 사연으로 문을 연다. 그 덕분에 얻은 비범한 능력과 다양한 표정으로 한 아이의 몸과 마음을 훌쩍 키워 낸 할머니는 내 할머니이면서 세상 모든 할머니이다. 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우리의 할머니들은 거칠거칠한 손바닥으로 배를 문지르며노래를 불러 아픔을 낫게 하는가 하면(뱃노래), “앉았던 자리마다 콩 싹이 트고 호박넝쿨이 굴러 나오게(쑥쑥 길어지는 이야기)” 만든다.

아이 손에 쥐어진 작은 지도 하나. 아이는 까마귀에게, 까치에게, 염소에게, 노루에게 물어물어 길을 나선다. “누구라도 베 짜는 나라로 어떻게 가는지 좀 알려 주겠니?” 커다란 배낭을 메고 긴 모험을 떠나려는 아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토록 궁금해하는 아이. 더듬더듬 혼자만의 사색에 잠기다가도, 불쑥 질문 하나를 던져 세상과 교감할 줄 아는 아이. 그 아이를 위한 길고 다정한 답으로 눈먼 할머니가 사는 베 짜는 나라의 막이 오른다. “웃음 많은 아빠는 씨실” “힘센 장사 엄마는 날실(베 짜는 나라)” 번갈아 꿰어 짠 몽글이가 구르고 굴러 동글동글 둥글어지며 바닷속 먼 곳을 다녀(돌멩이 이야기)”오면 할머니가 꼬투리 속 잠든엉덩이를 토닥인 후 좁지만 환한 문을 열어(주렁주렁 강낭콩)”주고, 오랜 기다림 끝에 목을 쭈욱 빼(겨울 씨앗)”서 드디어 세상에 나타난다. 동그란 눈도, 반짝이는 보조개도, 노란 웃음도 다 할머니 작품이다. 강낭콩같이 조그맣던 생명이 넝쿨처럼 쑥쑥 자라 두 팔을 힘차게 흔들며 언니처럼 굴기까지의 여정은 한 아이의 성장앨범을 넘겨 보는 듯 구체적이면서 보편적이다.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 명랑한 아이의 음성이 들리거나, 저 먼 보름달 뒤에서 눈먼 할머니가 철컥철컥 베를 짜다가 멈추고 손 흔드는 게 보인다면 그곳에 있는 아이는 내 유년일 것이다. 신비로운 나의 나라로 여행하고 싶은 독자님께, 여기요, 여기 있어요. 굴러다니는 노란 웃음 한 광주리 담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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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눈먼 할머니

임수현

 

 

세 살 때

나뭇가지가 눈을 찔러

눈이 먼 할머니

눈이 멀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게 되었고

들리지 않는 것까지 듣게 되었어요

닭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죽어 가던 토끼를 살리고

뱀의 똬리를 풀어 줬어요

사는 것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내게 끊임없이 들려줬어요

나는 담쟁이가 되어

할머니 이야기를 받아먹으며

무럭무럭 벽을 기어올랐어요

눈먼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눈 밝은 이야기로 돌아와

내가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줬거든요

내 머리를 땋아 주고

콩에서 콩깍지를 골라내고

이불을 지었던 할머니

내가 부르면

저 먼 보름달 뒤에서 손을 흔들어요

 

동시집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문학동네, 2023.

 

 

 

 

 

 

주렁주렁 강낭콩

 

임수현

 

 

할머니는

무릎에서 구름을 꺼내

비를 내리고

입김을 불어 꽃을 피웁니다

 

저녁에는 별을 불러 모으고

새벽에는 철컥철컥 베를 짜고

 

손바닥에서 넝쿨을 꺼내

달을 잡아당겨요

 

꼬투리 속

잠든

내 엉덩이를 토닥이며

이제 나가도 되겠구나

 

좁지만 환한 문을 열어줍니다

 

동시집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문학동네, 2023.

 

 

 

 

 

그림자 빨래

 

임수현

 

 

비누로 그림자를 빨면

까만 발자국이 달려 나와요

 

운동장으로 학원으로 마구 뛰어다녀

새카만 발자국이에요

 

탁탁 털어

따뜻한 곳에 말려 두어요

 

내일 아침이면

뽀송한 그림자를 신고

또 달려야 하니까요

 

달리다 달리다 숨이 차면

잠시 기다렸다가 같이 가요

 

지금은 빨래집게에 집혀

하얗게 말라 가고 있는 내 그림자예요

 

동시집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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