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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 시집 『크로노그래프』 여우난골 시인선으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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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3. 2. 2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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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하려는 의지와 잊어버리려는 노력 사이에서 빚어진 아픈 화법

 

 

 

김분홍 기자

 

 

 

1998현대문학으로 등단한 강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크로노그래프가 출간되었다.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을 출간한 바 있는 시인은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에 선정되어 기금을 받았으며 전국계간문예지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한 강순 시인은 이전에 출간한 두 권의 시집을 통해 고통을 견뎌내는 인간의 내적 동력을 담백한 색감의 시어들로 치환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내밀한 언어와 매혹적인 사유가 결합한 감각적 화폭을 보여주는 시인”(유성호 평론가), “가난한 잠과 꿈을 부풀려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내는 연금술사”(신동옥 시인)와 같은 찬사는 현실적 고통과 시적 색감 사이의 먼 거리를 독창적인 시적 상상력으로 연결해온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한 적절한 평가다.

 

크로노그래프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시 크로노그래프에서 운명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시간 장치 속에 들어가 있으면/밤은 죽은 듯 활개 치는 동사라는 매력적인 표현을 통해 이 시집의 주제와 형식의 본질을 눈여겨보게 한다. 즉 상기하려는 의지와 잊어버리려는 노력 사이에서 강순 시인의 아픈 화법은 빚어졌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강순 시인에게 시간은 관능이다. 이 관능성은 시인이 그리움에 기대어 시간을 가늠하고 시간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아이를 깨운다 아이를 깨울 수 없어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지를 수 없어 사정을 한다 사정을 할 수 없어 운다 울 수 없어 그림을 그린다”(엄마 되기) “여성의 구속구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이다. 좋은 아내 또는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여자를 구속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엄마 되기는 최선을 다한다는 말보다 잔인한 말이 없다는 박동억 평론가의 말은 일과 가사를 전담해야하는 여성의 입장에서 아이를 낳은 죄가 얼마나 큰지 그래서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아이에게 엄마는 영원히 을()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애월 녹턴은 강순 시인의 고향 제주이야기다. “내게는 왜 땅 한 평도 남기지 않았어요/ 그것은 검은 구름의 몫이란다/ 나는 짐을 부릴 방이 없어요/ 너는 저 창공이 집이잖니”(애월 녹턴) 이런 내밀한 가족사는 다항식에서 요양병원에 모신 어머니의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요양병원은 역병으로 병문안을 차단하고 엄마는 전화기 속에서 매번 희미한 불씨를 건네지 반복되는 단순한 단어로 불을 지필수록 귓바퀴는 더 슬퍼지고 미완의 불씨는 더 이상 동굴 벽을 밝힐 수가 없어”(다항식)

 

매일 반복되는 버거운 현실 속에서 삶의 동력을 찾기 힘들었을 독자들에게, “착한 마녀의 언어를 담은 강순 시인의 시집 크로노그래프는 특별한 위로의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

 

 

강순

 

 

밤은 그러니까 동사다

깨다 일어나다 가다 보다 앉다 서다 눕다 울다 들이

뭉치고 엉키는 자리에

꿈틀대다 치대다 우물거리다 씹다 내뱉다 걷다 삼키다 들이

해변 위 파도처럼 넘나든다

 

운명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시간 장치 속에 들어가 있으면

밤은 죽은 듯 활개치는 동사다

 

초침보다 더 빨리 어제 한 말을 후회하고

오늘 못다 한 말을 반성할 때

동사들이 쓸려오고 쓸려간다

 

가만히 있어도 밤이 우리를 움직인다

동사는 과거와 현재의 우리를 합한 말

 

숨을 내쉬면 네가 썰물처럼 쓸려가고

숨을 들이쉬면 내가 너를 해변에 심어 놓는다

 

우리는 밀려갔다 밀려왔다 밀었다 당겼다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지구와 달처럼

우리 인력과 원심력을 밤에 슬피 쓰고 있다

 

쓴다, 라는 말은 내가 가장 아끼는 동사

너의 발자국과 나의 속눈썹도 모두 쓴다,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지

 

우리는 파도의 심장을 달고

시간 속에서 서로를 철썩이다가

우리를 다 쓰기도 전에

파고를 서둘러 떠나는 심해 잠수정 같아

 

우리를 떠나 더 깊고 캄캄한 우리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밤의 동사들 그것이 우리인 거지

 

― 『크로노그래프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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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방향

마녀일기 11

 

 

강순

 

 

눈을 감으면

 

죽은 이들이 모래사막을 끌고 왔다

발을 내딛으면 발목이 사라져 사막에 갇혔다

손을 흔들자 검은 새들이 어디선가 솟아나

난민들이 모여드는 국경 쪽으로 사라져갔다

 

사막이 바람 앞에 엎드려 목숨들을 묻을 때

사람들은 신의 목소리를 잊는 법을 배워

인공지능 제품에 스마트한 예의를 갖췄다

 

나에게 남은 건 지팡이 하나뿐

아직도 심장 속에는 펄떡이는 귀가 있는가

 

죽은 이들의 말 조각들이 얼굴에 부딪혔다

모래 속에서 그것들을 주워 올려 어루만졌다

 

집은 어디로 가나요

바람이 방향을 바꾸면 우리는 모두 묻히나요

질문에서 붉은 눈물이 솟아나 울음 기둥이 되었다

 

이름 없는 무덤들을 사생아로 낳은 바람아

나는 꿈인 듯 바보인 듯 마법 지팡이를 든 사람

 

무심한 구름은 사막 위에서 언제 비가 되는가

숨은 별은 암흑 속에서 언제 나침반이 되는가

 

속수무책과 오래 손잡은 회전초처럼

묵묵부답에 잡혀 기울어진 자세로

 

앞이 보이지 않는 모래폭풍 속

거친 숨소리 쪽으로 지팡이를 계속 휘둘렀다

 

집은 어느 방향인가요

거기에는 만년 전에 사라진 또 다른 신이 있나요

지친 눈동자의 사람들이 나를 향해 걸어올 때

 

지팡이를 더 크게 휘두르자

 

폭풍이 잦아들고 하얀 새 몇 마리 날아올라

마지막 아껴 두었던 말은 발목뼈로 만든 것

조각조각 모래와 섞여

새가 날아가는 방향으로 하얗게 튀어올라

 

눈을 뜨면

기적처럼

 

방황하던 발목이 돌아오고

단단한 눈물 기둥이 홀연

 

푸른빛 강줄기가 되어 우리 모두

검은 손을 씻으며 강가에 짐을 부릴 것 같았다

 

― 『크로노그래프, 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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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가 나를 택할 때

 

 

강순

 

 

서랍을 뒤질 때마다 서로 다른 얼굴들이 손에 잡혀 오늘은 다정한 얼굴을 뒤집어쓰기로 해 서랍에 갇힌 얼굴들은 깊은 복도를 지나 서로의 밀실을 백 개쯤 두고 있어 밀실에는 끝없는 잠이 숲속으로 쏟아져 흰 눈처럼 소복이 쌓이는 잠을 밟고 걸어가면 나는 삼백 년 동안 밀린 빚을 갚는 마녀, 검은 얼굴을 감추고 웃다 보면 점점 하얗게 되어 가 온통 하얀 숲이 내 전생일지 모른다는 생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도 된다면 며칠쯤 서랍 속에서 울음으로 양탄자를 만들래 오늘은 어제의 컴컴한 복도를 지나 다정한 얼굴이 나를 붙드네 미소가 나를 택하면 나는 죽은 사람의 머리를 내밀어 미소를 뒤집어쓰지 늑대와 악어 들을 문밖에 두고 오늘도 안녕? 오늘의 얼굴을 다시 갖다 놓을 때까지 당신도 안녕? 안녕이라는 새 언어를 배운 지 삼십 일 정도 되어 가

 

― 『크로노그래프, 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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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 시집 『크로노그래프』 여우난골 시인선으로 출간 - 미디어 시in

김분홍 기자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강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크로노그래프』가 출간되었다.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을 출간한 바 있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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