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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주변과 마음의 갈피들을 쓰다듬는 언어들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3. 2. 12.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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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적인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모색

 

 

 

하린 기자

 

 

2002시와시학으로 등단한 이래 시집 아주 잠깐』 『아름다운 도둑』 『소리의 감옥』 『하멜서신』『다섯 손가락이 남습니다을 상재하고 <김달진문학상> <발견문학상> <편운문학상> <백호임제문학상> <백호임제문학상> <김준오시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는 신덕룡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단월을 출간했다.

 

시인은 그동안 낮게 공명하는 풍경들을 시라는 공간 속에서 재현해 왔으며, 우리 주변의 낯익은 존재들이 가진 생의 기미와 비애를 어렵지 않은 어휘와 공감대가 큰 형상으로 그려내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해 주곤 했다. 그가 문학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에는 작고 외로운 하나의 개체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개체들은 존재의 국면을 애면글면 정황 속에서 드러내는데, 그 재현된 형상에는 자극성은 없고 감흥을 유발하는 요소와 직관적인 통찰만 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작고 외로운 하나의 개체들을 껴안게 되고 그 존재들이 오히려 세상을 움직이는 핵심적인 동력이란 생각에 젖게 된다.

 

시집단원에서도 시인이 갖고 있던 큰 틀의 문학적 흐름은 계속된다. 세부적인 변화 양상으로 드러난 지점은 이번 시집이 근대적인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모색적 측면을 갖는다는 점이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유를 바탕으로 자아와 타자(세계)가 만나고 헤어지는 연결성과 연속성을 일상 속 포착과 직관을 통해 드러낸다.

 

우리(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모두는 떨림을 간직한 채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에, 조금씩 다르지만 때로는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밀려드는 바깥을 받아들인다. 견딤과 설렘이 교차되는 순간,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그 떨림의 순간들을 신덕룡 시인은 놓치지 않고 시화시킨다. 그래서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수많은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공존의 영역과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해설을 쓴 고봉준 평론가도 신덕룡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경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다. 그것은 도시적 삶이 만들어 놓은 인간(문명)과 자연의 구분, 즉 인간이 주체이고 자연은 대상이라는 구분이 지워지는 경험으로 구체화된다.” 라고 말했다. “기존에 존재하던 분할/경계가 해체되는 장면에 관심을 집중하고있으며, 거기에서 얻어진 경험 맥락을 통해 관념이나 신념의 차원을 벗어난경계의 다양한 지점과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공존 지점을 이야기한다고 본 것이다.

 

신덕룡 시집을 읽으면 지금은 너무 낮고 아득해서 잘 들리지 않지만, 그러나 결코 지울 수 없는 마음의 길”(고재종)을 만나게 된다. 그 길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타자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공존의 길이다. 읽고 나면 따뜻한 관계 설정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수많은 당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이쪽과 저쪽

 

 

신덕룡

 

 

뒤뜰의 풀숲이 수상해서

울타리를 쳤다

 

이쪽과 저쪽이 생겼다 이쪽은 안쪽이고 저쪽은 바깥이다 촘촘한 철망이라 바깥이 안쪽을 넘보거나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다 입 꽉 다문 채 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것처럼 확실해졌다 서 있는 등 뒤 역시 바깥이라는 건 미처 몰랐다 오늘 아침,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 아래 햇볕 환한 섬돌 곁에 꽃뱀 한 마리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말끔하게 벗겨진 불안의 민낯이다 처음부터 마음먹지 말았어야 했다 안팎을 가르고 끙끙 앓는 것보다 터놓고 지내는 게 나을 뻔했다 너무 빨랐다

 

― 『단월, 여우난골,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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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完結)

 

 

신덕룡

 

 

한동안 비구름이 머물렀던 자리에

배추무름병이 몰려왔다

 

그늘 속으로 파고들었다

 

밑동이 썩어가는데도 텃밭의 배추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말없이 버티다 어느 순간 픽 쓰러져

땅의 일부가 되어가는 중이다

 

뒤가 없다

 

우주의 한 모퉁이를 돌아가면

어딘가에 빈자리가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 『단월, 여우난골,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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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신덕룡

 

 

잠깐 사이

한 세상이 뒤집어졌다

 

폭탄이라도 맞은 듯 갈가리 찢겨나간 집과 바람에 흩날리는 검부러기들 방금 전까지 입 벌리고 짹짹거리던 붉은 살덩어리들

 

둥지의 적요와 주검이 한껏 숨죽이며 내쉬는 숨결 사이로 바람보다 빠르게 하나둘 스쳐 가는, 마냥 의심할 수밖에 없는 용의자들

 

곱씹어 되새기는 오목눈이의 눈망울에

수만 가지의 표정들이 맺혔다

 

나락에 떨어졌다가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는 말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그건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이들의 허언일 뿐이라는 듯

 

제 안의 울음통을 다 비워버린 어미 새는, 작은 발로 꾹꾹 제 가슴을 눌러가며 바닥을 만들고 있다

 

― 『단월, 여우난골,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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