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박라연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으로 발간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3. 2. 9. 10:06

본문

- 감내하고 곱씹으며 현생 너머를 향해 뻗어가는 시적 상상력

 

 

 

강재남 기자

 

 

 

박라연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문학과지성, 202211)이 출간됐다. 1990동아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윤동주상 문학 부문 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박두진문학상, 영랑시문학상을 수상하며, “자아에 갇히지 않고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일상의 걱정거리나 괴로움이 사물로 변화하며 자연적·우주적 에너지를 품어 아름다워지는 과정을 보여줬다.”(영랑시문학상 심사평에서)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문단 데뷔 32년째를 맞은 박라연 시인은 특유의 따뜻함과 섬세함을 담아 한층 깊어진 시 세계를 펼쳐 보이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특히 마시고 만져지면서 닳아지는 물질이/이제 저는 아니라고 선언한다. 이로써 생각하는 일만 허용되는 색깔로 살게”(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된 시인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증이 더해진다.

 

김종훈 문학평론가는 내면에서 외부와의 접면으로, 인물에서 세상으로, 현생에서 내생으로 시적 상상력이 연장된다는 것을 해설에 붙이면서, “현생에서의 연대보다는 내생에 이어질 인연확실한 현재보다 불확실한 다른 세계를 향해 상상력을 뻗어” “모르는 세계이지만 훌쩍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자연스러운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의 인식이 닿지 못하는 곳, 인식 바깥의 영역을 상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생의 연대보다 내생에 이어질 인연에 대한 관심과 그로 인해 현생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위상이 재조정된다는 것을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은 추구한다.

 

한편 뒤편의 세계에 함부로 설렌 죄 기울어진 세계에 의탁한 죄 저울에 올린다 흔들린다 사람도 시대도 흔들리며 연명하는 피사의 탑 기분의 햇빛이 질 때 식물 등을 켠다 따뜻하게 구워질 때 세상의 취사병인 시를 받는다 한 현상에서 다른 목숨 다른 이름 아무도 들은 적 없는 메아리를 불러내는 최면술사가 될 것 추위가 따뜻함의 처음이라면 미미한 빛이 행복이라면 가시를 빼낼 시 추운 발등 덮어줄 시를 고집할 것이라는 뒤표지 글에서 박라연 시인에게 있어 이번 생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 잠시 머물렀다 옮기는 임시거처임을 엿볼 수 있다.

 

틀에 박힌 생활에 짓눌렸거나, 일탈을 생활의 일부라고 여기는 독자에게 박라연 시집을 권한다. 일탈과 구속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이번 생의 가치라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줄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누구나 추위가 살아 있어서

 

박라연

 

 

추위는 따뜻함의 처음인데 비싸게 사 온 따뜻함도 세상만사 시들할 땐 뭘 데워준다는 의미가 의뭉해 그날 딱 그러했어 아궁이 열어 통나무 곁에 솔가지 하나 넣고 죽거나 말거나

 

낡아빠진 추위는 그날도 활활 타오르지 못했나? 혼자 늙어 죽었나? ,에게 중얼중얼 종일 엇갈린 심사와 실랑이하며 저녁에 누웠는데 따끈하다

 

뭐야? 죽은 구들장에서 피가 왜 돌지? 가난한 등짝 아래의 손은 어디서 나온 무슨 마음인지 여전히 보고 싶다는 말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지 튀어나와 아궁이

 

연다 재뿐이다 통나무의 추위가 살아서 불타올라 주인의 등을 위해 온전히 사라졌다는 예측이 가능한데 외로움이 따뜻함보다 수명이 길까!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문학과지성사, 2022

 

------------------------

 

소녀는 환하고 나는 유리창을 닦는다

 

박라연

 

 

그릇에 넣어줘야 먹을 수 있잖아? 몸이 없으면

금방 떨어져 죽고 말던데 말만도

마음만도 고맙다고? 어휴

 

말이든 마음이든 걷고 뛰고 버스에 기차에 오르려면

몸이 필요해

 

계산된 마음이 얼비치자마자 죽사발 될까 봐

가난하면 가난한 채로

못 배우면 못 배운 채로 쑥쑥 자라던 소녀는 환하고

나는 유리창을 닦는다

 

화기애애 좀 열어주시겠어요?

아 네 네 그저 유리창이나 닦는 일 누구에게라도

만만하게 뵈는 일이 최고죠 네 네

 

훤히 비치는 물결 위 연두나 꽃잎을 쓰다듬던 고객들

팔만 쭉 뻗으면 붉은

열매쯤은 얼마든지 손에 쥘 수 있다는 듯

 

굳은살 박인 네 고독은 얼마든지 뜯어내 휘저으며

내동댕이칠 수 있다는 듯

 

그럼 그럼! 무료함을 흔들어대면서좀더 오래

놀다 가실 거라서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문학과지성사, 2022

 

--------------------

 

 

몬테그로토에 밤이 오면

 

박라연

 

 

상처가 노을의 일부인 줄 몰랐을 때

그의 시간 속에 붉은 노을 스며들 때

남남인 어제의 아픈 고백들이 흘러들어와

조금은 더 붉게 붉어졌다

 

하늘이

사람이라는 씨앗을 땅에 뿌려놓으시고

완전체의 지루함을 견디시는 중인 셈이다

노을로 퍼지는 희로애락을 즐기시는 중이다

 

이 저녁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제 몸 거쳐 간 노을들이 고뿔 들 때

설사할 때 공부할 때 밥벌이할 때

부부가 되었을 때

 

그들의 잔잔한 어미가 되어 붉었을 것이다

생로병사까지 넘보면서 붉게 흘러갔을 것이다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문학과지성사, 2022

 

 

박라연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으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박라연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으로 발간 - 미디어 시in

강재남 기자 박라연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문학과지성, 2022년 11월)이 출간됐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윤동주상 문학

www.msiin.co.kr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