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
강재남
<자기야>로 들었어요 수줍게 몸이 열렸지요
<응> 대답을 하니 초경혈 마냥 비리고 아릿한 웃음이 피더군요
그것은 내 처음과 끝의 은신처 초경혈이 지니는 무심한 비의
그러니까 작약, 나의 죽음을 흥미롭게 받아들여도 좋았을 일이다 의식이 몸을 빠져나가는 것은 햇볕 잘 드는 이층에서 굳게 다문 네 꽃잎을 뜯어 먹는 일처럼 서정적이었으므로 그리고 햇볕이 빠르게 지나는 창문 아래로 네 그림자가 기울어지는 광경을 목도한 것처럼 간결하였으므로 그런데도 작약, 내 몸은 여전히 차다 알타이산맥을 가로지르는 야생의 순록처럼 4천 년 전 이유 없이 멸종한 매머드의 화석처럼 웃음기 거둔 낮달은 누구의 얼굴일까 초경혈 번진 달의 표면에 표정을 그리는 건 껍데기를 걸친 나의 다른 모습 네가 필 때 너의 웃음에서 태어난 나는 나의 자기인 것 그러므로 작약, 나는 매번 나로부터 번역되고 나를 거역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던 거다 네가 나로 들리는 내 귀는 감각적이고 관능적이어서 반역이다 네 꽃잎을 뜯어 먹은 손가락과 입술과 도발적인 혀를 잘라줘
― ≪시산문≫ 2015년 여름호.
강재남 시인 _ 작약 < 포토포엠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김휼 시인 _ 단단한, 위기(圍碁) (1) | 2023.03.14 |
---|---|
리호 시인 _ 기타와 바게트 (0) | 2023.02.25 |
차유오 시인 _ 「침투」 (0) | 2023.01.28 |
하두자 시인 _ 「사과는 둥글고 악수는 어색하게」 (0) | 2023.01.28 |
박정은 시인 _ 「크레바스에서」 (0) | 2023.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