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기자
제9회 박영근작품상 수상자로 허유미 시인이 선정되었다. 수상 작품은 <첫물질>이다.
노동자 시인 박영근(1958~2006)을 기리기 위한 제9회 박영근작품상에 허유미 시인이 선정되었다. 수상작인 ‘첫물질’은 열다섯 제주 해녀의 첫 잠수 경험을 그린 시로서 박일환 시인, 박수연 문학평론가, 오창은 문학평론가가 심사를 맡았다. 시상식은 2023년 5월13일 토요일, 오후 4시 인천 신트리 공원 박영근 시비 앞에서 진행되며 상금은 200만원이다.
아래는 수상작 ‘첫물질’ 시 전문과 수상소감, 심사평이다.
< 제9회 박영근작품상 > _ 수상작
첫물질
허유미
노래를 따라가 보니 물속이었다
무슨 노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요일 아침 햇살 같은 물빛이었다
엄마는 담배를 물고 불안으로 늙고 있었다
섬에서 늙는다는 건 비밀이 될 수 없다
덜 먹고 덜 기대하고 덜 꿈꾸는 것이 비밀이었다
비밀을 없애기 위해 물에 드는 여인들의 노래는
바다의 상상이었다
여인들의 얼굴은 눈이 부시었다가 흐릿해졌다
명령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낭만도 아니었다
순전히 노래가 가는 방향이 물이었기 때문이다
불안과 비밀을 나눌 곳이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노래는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했다
돌고래만 지나는 물길은 잊어도
노래를 잊지 못하는 건 바다의 상상 끝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마주한 여인의 표정이 나이고
나는 여럿이고 봄밤이 가라앉고 있었다
노래는 춤인 듯하고 춤은 물의 윤곽인 듯했다
거기서부터 알면 된다는 듯 손금이 늘어났다
서툰 만큼 울어도 되는 곳이었다
열다섯을 지나는 그곳에 나는 있었다
― 앤솔로지 『시골시인-J』(걷는사람, 2022)
< 제9회 박영근작품상 > _ 수상소감 _ 허유미
소라 철이 되기 전에 엄마는 망사리부터 고치신다. 소라 철 망사리는 보통 물질하러 가는 망사리보다 사이즈가 크다. 소라를 많이 하는 날은 100kg을 하니 그 많은 소라를 큰 망사리에 다 넣은 다음 몇 시간을 헤엄쳐 뭍으로 올라와야 하니 망사리가 찢기면 낭패다. 어렸을 적 하교 후 집에 있다가 저녁 무렵에는 엄마가 물에 드는 바다에 갔다. 아궁이에 엄마가 간식이나 끼니로 먹으라고 준비해둔 군고구마나 구운 귤을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고 잰걸음으로 걷는데도 바다는 멀게만 느껴졌다. 가다 쉬는 중간에 고구마와 귤은 한 입 거리도 안 되었다. 배가 곯아 힘이 빠져 집으로 돌아가려니 돌아가는 길이 더 멀어 다시 바다로 가게 된다. 엄마는 내가 바다에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젖은 몸으로 안아 줄 수도 없고 먹일 거라곤 늘 먹는 갯것들밖에 없어서 오지 말라 하셨다. 엄마가 매번 역정을 내시는 데도 나는 매번 바다에 갔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를 보지 못 하는 날도 있어서 내가 부릴 수 있는 투정이면서 재롱이었다.
박영근작품상에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오랫동안 멍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시로 처음 상을 받던 날 내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보다 더.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에 바짓단이 젖어 종아리가 시려 정신을 차리고 엄마께 전화를 하니 “바당에 있저” 한마디만 하고 바로 끊으셨다. 일이 바쁜 와중에 내 전화를 끊는 건 엄마의 명랑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힘든 물질을 견디는 법을 엄마는 몰랐다. 다만 바다에서는 어제보다 오늘 더 숨을 참고 내일은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몸으로 견디는 거라고 배웠고, 몇 년이 지나도 물질을 하고 싶어지면 마음도 견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이렇게 사시는 엄마와 엄마 같은 분들을 한 번쯤은 오래 포옹하고 밤새 위로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다. 하지만 어떤 시는 창백한 시어가 가득하고 어떤 시는 위험하고 슬픈 시도 있었다. 그분들의 삶을 다 품어주고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싶었으나 늘 부족해 할일을 못 한 기분이 들어 불안한 날도 많았다. 이런 와중에 수상 소식은 세상의 전율을 한 몸에 받은 순간이다. 감각과 생각이 멈출 수밖에 없는 일이다. 멍한 시간만큼 큰 눈물방울 속에 있었다.
박영근작품상의 의미를 되새기며, 내가 부족하다 여기는 순간에 멈추지 않고 힘을 내겠습니다. 나의 눈물을 먼저 보지 않고 춥고 어두운 곳의 눈물을 먼저 보며 가슴에 담아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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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회 박영근작품상 > _ 심사평
서정적 울림을 이끌어낸 리듬 있는 삶의 언어 감각
박영근 시인은 “서정적 울림으로 설득력 있는 현실을 얻는” 시를 열망했다. 아무리 깊게 사유하더라도, 깊은 울림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시는 앙상한 언어에 머물고 만다. 깊은 울림이란 무엇인가? 박영근 시인에게는 시가 길러낸 ‘설득력 있는 현실’의 울림이었다. 그 울림은 문학적으로 재구성된 현실에 기인한 것이자, 보이는 현실 이면의 숨겨진 진실을 발굴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제9회 박영근작품상 본심 심사위원들은 예심위원들이 추천한 19편의 시들을 면밀히 살피고 숙고하며 토론했다. 각각의 시편들은 보이는 현실 뒤편의 숨겨진 진실을 시적 언어로 포착해낸 소중한 결실들이었다. 그 중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유독 끌어당긴 작품이 허유미의 「첫물질」이다.
「첫물질」은 제주 해녀의 첫 잠수의 경험을 그린 인상적인 시편이다. 어느 일요일 봄날, 열다섯의 소녀가 생애 ‘첫물질’을 한다. 그 기억과 감각이 시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녀의 첫물질은 낭만적 이끌림도 아니었고, 생계를 위해 강제된 것도 아니었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노래에 홀린 듯 바다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그 물속에서 제주 여인의 표정을 발견한다. 서툰 물질에서 삶의 비애를 마주하고 만 것이다. 옛날 제주 여인의, 제주 해녀의 비밀은 “덜 먹고 덜 기대하고 덜 꿈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속에서 불안과 비밀을 여인들끼리 나누고, 서로의 운명을 위로하듯 공유했다. 이 여인들에게 두 개의 공간과 세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공간적으로 물 밖과 물 안이 있다. 물 밖은 일상의 공간이고, 물 안은 ‘서로의 불안과 비밀을 나누는 곳’이다. 세 개의 시간은 첫물질이 시작된 ‘열다섯의 시간’과 ‘섬에서 늙어가고 있는 엄마(해녀들)의 장구한 시간’, 그리고 과거를 그려내는 시적 화자의 ‘현재의 시간’이다. 이 시간의 겹쳐짐이 제주 여성들의 ‘비밀스러운 운명’을 관통한다. 첫물질은 여성으로서 불안과 비밀을 안고 들어가는 첫 입수이자, 열다섯의 젊은 ‘나’가 ‘엄마의 표정’을 이해하는 성숙과의 마주함이기도 하다. 「첫물질」은 해녀의 ‘첫물질’을 노래의 리듬처럼, 파도의 율동과 같이, 춤사위의 흐느적거림으로 그려냈다. 제주 해녀의 물질을 이렇듯 감각적으로 끌어낸 작품이 있었던가 하는 감탄을 불러오는 성취작이다.
허유미 시인은 2015년 제주작가 신인상을 받았고, 2019년 서정시학 신인상을 받은 신진이다. 제주라는 장소성을 시적 언어로 잘 형상화하면서도, 내면의 정서를 감각적 언어로 포착해낸 시인의 능력이 예사롭지 않다. 자기 터전에 굳게 발을 딛고 서면, 든든한 언어 감각으로 시적 안정감을 획득하게 된다. 허유미는 제주의 시인이면서, 섬과 뭍을 아우르는 삶에 대한 따스한 서정을 간직한 시인이다.
제9회째 맞이하는 박영근작품상을 신진 허유미 시인에게 수여할 수 있어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허유미 시인이 한국 문학에 ‘서정적 울림’을 더 많이 길러낼 것이라는 큰 믿음을 갖게 된다. 뜨거운 기대와 열렬한 축하를 함께 건넨다.
― 본심위원: 박수연(문학평론가), 박일환(시인), 오창은(문학평론가)
허유미 시인 ‘첫물질’, 제9회 박영근작품상 선정 < 현장+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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