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전거
오종문
어떤 사내라도 품을 수 없는 자존심이
몇 번 휑한 바람에 쓰러지고 부러졌다
그림자 더 짧아진 길
아버지가 가고 있다
화려한 날 다 보내고 뿌리를 갉아 먹는
검버섯 피어나는 서책을 싣고 오나
자전거 그 바큇살에 햇살들로 반짝였다
거룩한 이름 석 자 깊은 고요로 남은
마음에 접지 못한 길 환하게 놓여 있다
풍경 속 고집스러운
아버지가 오고 있다
— 오종문, 『아버지의 자전거』, 이미지북,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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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아버지란 이름에는 막중한 무게감이 있다. 물러설 곳 없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버지들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주름진 얼굴과 흰머리를 떠올리며 손때 묻은 추억의 물건을 만지다 보면 아버지의 지난했던 삶, 그 궤적을 돌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적인 가부장제로 인하여 아버지들은 가장으로서의 권한과 임무를 부여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사회의 기대가 요구하는 남자다움이란 남성만의 통솔력이나 독점력으로 집중되었다. 강한 남성상이 좋은 남편과 좋은 아버지의 조건이 된다는 무의식적 고정관념은 부담감과 책임 의식을 동반했다.
오종문 시인은 일상의 소재인 자전거를 통해 아버지와의 기억을 소환한다. 그는 애정 표현에 서툰 아버지를 “고집스러운” 존재로 표현하면서 이제는 “거룩한 이름 석 자 깊은 고요로 남”아 만날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워한다. 아련해진 옛 모습은 “풍경 속”의 풍경이 되어 과거와 현재의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 시간의 경계에는 “마음에 접지 못한 길” 하나가 놓여 있다. 아버지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다.
“어떤 사내라도 품을 수 없는 자존심”으로 삶을 지탱해온 아버지. 현실의 무게를 짊어지면서도 강한 모습으로 버텨 주던 아버지가 “몇 번 휑한 바람에 쓰러지고 부러”진 후, 가족의 삶 뒤편 “그림자 더 짧아진 길”로 걸어갔다. 아버지는 “화려한 날 다 보내고 뿌리를 갉아 먹는” 낡고 어두운 시간을 마주한다. 한없이 작아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가족을 향한 아버지의 묵묵한 사랑을 읽어내는 시인. “검버섯 피어나는 서책을 싣고 오”는 아버지를 마중하며 지난날의 시간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본다. 이 시를 읽으며 아버지라는 이름의 상속자,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생각하고 있다. (김보람 시인)
김보람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모든 날의 이튿날』, 『괜히 그린 얼굴』,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 연구서 『현대시조와 리듬』이 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유망작가에 선정되었다. 21세기시조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http://www.msi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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