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인(發靷)
박정호
달개비야 비비추야 돌 바늘꽃 기대 사는 영산강 더디 걸어 장장하일 따라가서 텅 비어 아득한 곳에 꽃씨를 묻고 온다.
그래서 살아지도록 그래서 죽어지도록 쥐고, 놓고, 놓고 쥐고, 보내고 떠나는 풀숲에 들꽃 보다 못한 이름 하나를 묻고 온다.
― 박정호, 『발인(發靷)』, 고요아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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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어서 가는, 저승에는 이승에서 가졌던 그 무엇도 가져갈 수 없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이승에서 취하는 그 무엇도 예외 없이 모두 다 빌려서 쓰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이승의 것을 소유하고 집착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고 덧없다. “텅 비어 아득한 곳에 꽃씨를 묻고" 오면 그 자리에 꽃이 핀다. 죽은 게 죽은 것이 아니다. 더 멀리 뛰기 위해서 잔뜩 몸을 움츠리는 행위와 같다. 철근을 꼿꼿하게 피기 위해서는 먼저 구부려야 한다. 최대한 자기를 낮춰야 가장 높게 올라갈 수 있다. 스스로를 높이면 떨어지는 길밖에 없다. 살려야 한다면 죽어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꽃씨가 깨져야 꽃이 태어난다. 씨앗의 죽음이 없으면 꽃도 나무도 태어날 수 없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고 열매에는 새로운 생명이 움틀 수 있는 씨앗이 들어 있다. 무덤 위에 요람이 들어서는 것과 같다. “쥐고, 놓고, 놓고, 쥐고”라는 말은 삶과 죽음이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이것이 무한반복 된다.
이 시의 제목인 '발인(發靷)'은 자연의 순리와 순환의 과정을 묘사한다. 음陰이 극에 달하면 양陽이 태어나고 양陽이 극에 달하면 음陰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일종의 보편적인 자연의 운동성이다. 보름달은 서서히 기울어서 점점 줄어드는데 초승달은 서서히 차오른다. 늘 모든 존재는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래서 살아지도록 그래서 죽어지도록 쥐고, 놓고, 놓고 쥐고, 보내고 떠나는 풀숲에 들꽃보다 못한 이름 하나를 묻고 오는 발인의 과정이 지나야 또 다른 생명이 움튼다. (이송희)
이송희
2003《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이름의 고고학』,『이태리 면사무소』,『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눈물로 읽는 사서함』,『길 위의 문장』,『경계의 시학』,『거울과 응시』,『현대시와 인지시학』,『유목의 서사』 등이 있다.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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