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정지윤
물이 새고 있다 빈틈없이 사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틈에 둥지를 틀고 나는 살고 있었다 틈 사이 봄을 놓쳐버리고 화초들을 말라가게 했다 틈이란 막다른 현실이 되면 더 커지거나 메워진다 또 한 방울의 물이 떨어지고 있다
존재의 모든 순간들
발 저리도록 쿵쿵거린다
― 정지윤, 『참치캔 의족』, 책만드는집,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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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틈이 있어야 산다. 틈이 너무 벌어지면 빠져 죽고, 틈이 빈틈없이 메워지면 숨이 막혀 죽는다. 틈은 적당히 필요하다. 틈이 있고 공간이 있어야, 소리도 나고 물도 흐르고 숨통도 트인다. 틈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다. 사전적 의미에 의하면 틈은 ‘모여 있는 사람의 속’이라고 되어있다. ‘어떤 행동을 할 만한 기회’라고도 한다. 이 적당한 틈(거리)이 없으면 관계 맺기도 어려워진다. 어떤 관계든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관계도 맺고 나의 세계도 구축할 수 있으며 나의 정체성도 지킬 수 있다.
틈이 없으면 불안하다. 내가 머물 수 있는 사적私的인 공간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나를 보호하고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공간이 필요한 법인데, 이러한 공간 자체가 없다면 우리의 존재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가령, 불을 너무 가까이 하면 뜨거워 탈 수 있고, 불로부터 너무 멀어지면 추워서 떨게 된다. 적당한 거리와 틈이 만족스럽고 안정된 관계를 형성하고,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 또한 거리와 틈이 없으면 다툴 수 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지켜야 할 선과 도리는 좋은 관계의 필수요건이다.
그러나 시적 주체는 “빈틈없이 사는 줄 알았다”며 물이 새고 있는 것에 당황하는 듯하다. “알고 보니 틈에 둥지를 틀고 나는 살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우리에겐 쉴 틈, 스스로를 돌아볼 틈이 필요하다. 분주한 생활 속에 살면서 정작 자신에게 ‘틈’을 내주지 않아 ”틈 사이 봄을 놓쳐버리고“ 그 사이에 “화초들을 말라”버리게 했다. “틈이란 막다른 현실이 되면 더 커지거나 메워진다”는 말속에는 제때 필요한 틈을 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이고 존재 이유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한 방울의 물이 떨어지”고, “존재의 모든 순간들”이 “발 저리도록 쿵쿵거”는 소리가 들린다. 빈 틈이 있어 사람 사는 소리가 새고, 그 소리를 듣는 내 삶에 빈 틈이 생겼다. (이송희 시인)
이송희
2003《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 『눈물로 읽는 사서함』,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거울과 응시』, 『현대시와 인지시학』, 『유목의 서사』 등이 있다.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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