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내리는 기억
—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을 보고
이송희
우리의 시간은 흘러내리고 있었어
여전히 절벽 너머는 보이지 않았지만
잘 섞인 어제와 내일은 말랑하고 부드러웠지
눈 녹듯 녹아내리는 유년의 해변가
모서리에 부딪혀 멍든 꿈이 떠다녔지
뒤틀린 눈 코 입들이 무의식을 채웠어
째깍이는 죽음에서 걸어 나온 그림자
형의 얼굴 지우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또 다른 페르소나가 당신으로 앉아 있어
기억은 돌아갈 수 없는, 나를 불러 세웠지
나무에 매달린 채로 눈 감은 수평선
어둠이 부풀기 전에 아침이 오고 있어
―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년 12월호
인간의 기억은 미래를 향해간다. 기억 속에 응축된 상상적 공간을 재현해 내면서 미적 세계를 재구성한다. 작가는 기억을 질료로 삼으며 인물과 풍경을 가공하고 미학적 공간을 창조해낸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서 기억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기억이 특정한 시간을 강렬하게 집약된 형태로 되살리는 원동력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제 개인의 기억이나 집단적 기억은 원초적 질료가 되어 왜곡, 축소, 강화하면서 예술 체험의 힘을 발현할 수 있다.
이송희 시인의 「흘러내리는 기억」은 과거의 인상이나 경험, 의식 속에 새겨두었던 삶의 지평이 시간 속에서 미끄러진다고 보고 있다. 기억을 말한다는 것은 시간을 이해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미술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그림 <기억의 지속>에 주목하면서 현실과 욕망의 해방을 위해 선택한 자동기술법의 꿈과 무의식을 따라간다. 이때 달리의 회화와 시인의 시 속에 나타나는 공간은 현실의 세계이자 환상의 세계인 것이다.
시인은 “잘 섞인 어제와 내일은 말랑하고 부드러웠”다고 이야기하며 전승되는 기억을 통해 삶의 방향을 추동해나간다. “눈 녹듯 녹아내리는 유년의 해변가”, “모서리에 부딪혀 멍든 꿈”, “뒤틀린 눈 코 입”과 같은 부조화의 조형은 익숙한 것들을 익숙하지 않은 문맥 속에 배치시킴으로써 충돌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억의 파편은 무의식 속에서 어떤 과거를 밀치고 당기면서 논리를 비틀다가 새로운 존재를 확인하게 한다. “째깍이는 죽음에서 걸어 나온 그림자”는 한 사람으로 규명하기 어려운 “또 다른 페르소나”의 “당신”들이다. “기억은 돌아갈 수 없는” 순간순간에 “나를 불러 세”워 화면 속의 배후를 들춰낸다. “나무에 매달린 채로 눈 감은 수평선”처럼 사실과 추상은 잠재적 사건으로 묻혀있다. 그러므로 “어둠이 부풀기 전에 아침이 오고 있”는 낯선 친숙함이란, 기억이 흐려지는 사람이 피뢰침같이 꽂히는 생각을 확인하는 일일테다. (김보람 시인)
김보람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모든 날의 이튿날』, 『괜히 그린 얼굴』,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 연구서 『현대시조와 리듬』이 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유망작가에 선정되었다. 21세기시조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12 _ 이송희의 「흘러내리는 기억」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12 _ 이송희의 「흘러내리는 기억」 - 미디어 시in
흘러내리는 기억— 달리의 그림 을 보고 이송희 우리의 시간은 흘러내리고 있었어 여전히 절벽 너머는 보이지 않았지만 잘 섞인 어제와 내일은 말랑하고 부드러웠지 눈 녹듯 녹아내리는 유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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