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김산 시인의 첫번째 시집 『키키』(민음사, 2011)는 “지구로의 자의적 불시착을 감행한 우주 소년의 강렬한 자기 선언”(출판사 소개글)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두 번째 시집 『치명』(파란, 2017)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복잡한 심경들이 천천히 어떤 무늬로 떠오르다가 마침내 화음을 이루는 과정”(장은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두 시집 모두 김산 시인의 미학적 지향성을 감각화된 언술로 반영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시집 『활력』(시인의일요일, 2023)은 그 어떤 미학적 포즈도 없이 정서적 떨림과 울림을 자연스럽게 전해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낮은 어조로 조곤조곤 시의 분위기를 이끌면서 슬픔의 후경으로 자리한 화자의 심리 상태를 자극성 없는 언술로 형상화한다.
그래서 시의 모티브로 자리한 슬픔을 껴안은 자, 뛰어넘는 자의 이미지가 공감대 있게 펼쳐진다. 그런 변화는 아마도 김산 시인이 사라지는 것들, 떠나가는 것들, 닳아버린 것들, 떨고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애틋함을 ‘반려적’ 태도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김산 시인이 운용하는 슬픔은 각각의 걸음걸이와 눈길의 전후좌우, 감각의 높낮이와 질감 모두를 거느린 채 함께 살고 있다. 슬픔이 갈등을 부추기는 대상(자학, 자괴, 비탄을 유발하는 대상)이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동반의 대상이나 ‘활력’의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김산 시인은 소소하고 일상적인 사물과 풍경 속에서, 자신만의 여리고 절절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의 남루를 『활력』에서 차분하게 보여준다. 이제 슬픔은 그에게 ‘마음살이’의 한 축이 되어 ‘반려’나 ‘동반’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독자들은 시를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맑고 밝은 슬픔 한 덩어리”(「시인의 말」)를 자연스럽게 감동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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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가라앉히기에 충분히 설득력 있는 노래
김산
내일의 심장은 어떤 모양으로 두근거릴까
이건 비문이어서 오늘의 뉴스는 적확하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날씨를 사랑해
폭염 혹은 폭우 그리고 기꺼이 외따로운 것들
올해는 장마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짧은 비가 다녀갔고 이 세계는 잘 구운 바게트 같아
한낮, 카페에 앉아 있는 쌍쌍의 연인들
사막 같아,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마음들은
어디서 불어온 것인가, 이런 평화로운 소란이여
시간이 흐를수록 결국 이별과 가까워지는 거야
알면서도 모른 척 재잘거리는 회색앵무새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을 존중해
그렇다고 그 무엇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
어두운 것들, 빛을 잃어서 더 환해지는 저녁이여
저 가로등은 한 번도 고갤 들은 적이 없어
슬픈 목이여, 구부러진 감정들이 빛나는 세계
대지를 밝히는 슬픔 사이로 또각또각 지나는 섬들
풀린 구두끈을 다시 묶으면 나는 완벽한 공벌레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날아가다 이내 가라앉는,
모든 적막이 공중과 빠이빠이 손을 흔들면서
가라앉지, 더 이상 가라앉을 수 없을 만큼
납작 엎드려 어떤 노래가 되는, 너를 닮은 새벽이여
― 『활력』, 시인의일요일,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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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 잎이 천천히 떨어지며 남기고 간 사소한 것들
김산
앞마당의 벚나무 잎이 작은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진다
큰 빗자루를 들고 떨어진 잎들을 쓸기 시작하면
바스락거리며 오그라든 당신의 지문이 조각조각 바서진다
바람과 빛과 물이 일제히 분열하며 공중으로 흩어진다
검지까지 쭉 뻗은 감정선과 손목으로 가다 끊긴 생명선
그래, 생각이 많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은 틀림없다
빗자루가 쓸리면서 빗자루도 아플 거라는 생각에
빗자루질을 멈추고 떨어지는 잎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겨우겨우 붙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벚나무 잎을 보면서
어디서 불어왔는지 찬바람이 오른 뺨을 할퀴고 간다
뺨으로 누구를 때렸다거나 해코지를 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
기껏해야 뺨은 누군가의 뺨을 비비거나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잠시 온기를 나누는 게 다 일뿐,
다시 빗자루를 잡고 떨어진 벚나무 잎들을 쓸기 시작한다
빗자루로 떨어진 잎의 뺨을 비비면서 언젠가 그 뺨을 타고 흘렀을
눈물의 길을 새롭게 닦아내기 시작한다
떨어진 잎들은 결코 버려지거나 낙오한 것이 아니다
바닥에 대고 무언가 할 말이 있어 가뿐하게 하산한 것이다
더 이상 매달려 있는 것도 지겨워, 그만 놓아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놓았다고 죽은 것이 아니듯 비로소 놓았으므로
바람을 타고 먼 곳으로 날아오르는 당신의 지금을
나는,
지극히,
사랑한다
― 『활력』, 시인의일요일,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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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김산
봄 갈 여름이 지나 어둑한 골목길에 해바라긴
아까부터 땅바닥에 엄마 얼굴 끄적거리고
집 나갔다 돌아온 열두 살 배기 흰둥이는
허연 속눈썹에 슬픔 한 바가질 묻히고 와서
죽은 어미 머리맡에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개머루 같은 콧방울로 지난 시간들을 킁킁 대네
뱃속에는 밥이 적고 입안에는 말이 적고
맘속에는 일이 없어야 한다던 법정처럼
무진장한 슬픔의 연좌 위에 가부좌를 튼 犬佛이랴
이러거나 저러거나 세상에서 가장 그지없는 건
돌아오지 않고 차마 멀리 멀리 돌아가는 것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큰삼촌도
돌아서 돌아서 에움길로 적막강산을 펼쳐 놓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세계의 하늘과 땅을 맞이은
바람과 하늘과 수많은 별들의 저녁 품으로 돌아갔네
제 몸을 가열하게 흔들어 기꺼이 씨방을 흔드는 꽃들
하루가 덜 여문 보름달처럼 부끄러워지는 오늘밤이네
― 『활력』, 시인의일요일, 2023.
김산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활력』, 시인의일요일에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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